한국 차문화 발전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에 관한 연구
2010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예문화와 다도학과
이정필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 방법과 범위
Ⅱ. 구산선문 성립과 차문화의 확산
1. 선종 도입 이전의 차문화
2. 구산선문의 개창
3. 구산선문에서 꽃 핀 차문화
Ⅲ. 고려 차문화의 융성과 불교의 역할
1. 고려 초기의 차생활
2. 팔관회와 연등회의 다의식
3. 승려의 다시에 나타난 차문화
Ⅳ. 조선의 억불책과 차문화의 침체
1. 조선초기 차산지와 사찰의 관계
2. 조선초기 사대부와 불승의 교류
3. 다게에 나타난 차문화
Ⅴ. 근대 차문화의 중흥과 불교의 공헌
1. 초의에 의한 차문화 부흥
2. <조선의 차와 선>에 나타난 사찰의 차문화
3. 기타 사찰의 차문화 전승
Ⅵ. 결론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 방법과 범위
Ⅱ. 구산선문 성립과 차문화의 확산
1. 선종 도입 이전의 차문화
1) 가야의 차문화
허왕후가 차씨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탑도 가져왔으므로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한국불교의 남장전래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차문화는 전래 초기부터 불교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다.
2) 삼국의 불교 전래와 차문화의 발전
고구려 무용총과 안악 3호분의 벽화에 차를 올리는 모습이 있기에 차문화와 관련된 당시 풍속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는 위도 상 차산지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던 백제도 당연히 차를 마셨으리라 짐작된다.
신라는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승려들이 중국의 발달된 차문화를 그대로 옮겨 왔음을 말할 필요가 없다.
3)통일신라 불교의 융성과 차문화
(1) 사찰의 다촌
양산 통도사의 <통도사사적기>에 차 마신 증거가 있다.
(2) 승려의 차생활
원효의 차생활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 이규보가 쓴 “남행월일기”에 전한다. 이 기록으로 원효가 살았던 7세기에 이미 한반도에 차가 널리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3) 불차에게 차 공양
부처에게 차를 공양하는 것은 불가의 오랜 풍습이었다.
2. 구산선문의 성립
3. 구산선문에서 꽃 핀 차문화
1) 마조도일의 법맥
차가 인간의 정신적인 세계와 결합하여 진정한 차문화가 된 것은 불교, 특히 선종과 만나고서부터이다. 선승들은 처음에는 차의 약리적인 각성작용에 착안하여 선 수행시 수마를 이기기 위해 차를 마셨다. 이후로 차문화는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달하였다.
“좋은 산이 있으면 좋은 절이 있고, 좋은 절이 있으면 좋은 차가 있다.”고 한 말은 마조의 농선 사상 이후에 생겨난 말일 것이다.
남전보원의 제자 조주종사는 ‘끽다거’의 화두로 차생활을 다선일미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2) 백장청규의 차
마조도일의 제자 중에서 백장청규는 불교 역사상 차문화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사람이다.
‘백장청규’의 내용에는 다탕행예(茶湯行藝)에 관한 법식이 차지하고 있는데 사찰에서의 생활 규범에 다례가 11개 항에 이를 정도로 많다.
일본의 말차 다법에서는 차를 이루는 점다행위를 ‘데마에(点前)’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 또한 백장청규의 용어이고 보면 홍주봉의 다법이 동양 삼국의 차문화에 매우 광범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선사들의 차 관련 비석과 기타 명문
남원 실상사 탑의 ‘茗’자, 장흥 보림사 탑의 ‘茶藥’이라는 글귀가 있다.
충남 보령군 성주산문의 개산조인 랑혜무염(郞慧無染)의 비문에는 제자의 예를 행하고 차와 향을 가지고 매달 찾아보았다.
성주사 무량의 사루에 세워진 비석에 ‘茗’자가 있다. 이 절에서 발견된 비석 파편에 ‘茶香手’라는 비문이 나왔다.
제천 월광사지 비에도 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경주 안압지 토기 잔에는 ‘言貞榮’이라는 명문 사이에 茶자가 있으며, 경주 남산 창림사지 와당에 ‘茶淵院’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Ⅲ. 고려 차문화의 융성과 불교의 역할
1. 고려 초기의 차생활
고려시대는 가히 음다왕국(飮茶王國)이라 할 만하다.
고려 태조 때 군민에게 차와 복두를 주었고, 승려에게도 차와 향을 하사하였다. ....... 이는 차가 의식의 매개물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승려에게 차는 부처님에게 공양을 드리는 중요한 물품으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2. 팔관회와 연등회의 다의식
국가적 규모의 행사에서 행한 진다의식은 삼국시대의 헌다의식이 발전된 것이다.
숙종이 차와 향을 보내어 삼각산 승가굴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의종 때 현화사에서는 차 겨루기를 하였다.
3. 승려의 다시에 나타난 차문화
대각국사가 차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전남 선암사에 대각국사의 차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Ⅳ. 조선의 억불책과 차문화의 침체
1. 조선초기 차산지와 사찰의 관계
정치적인 탄압을 받은 불교사원은 산속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불교사원은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차도 자가 생산하였다.
2. 조선초기 사대부와 불승의 교류
사원은 자급자족하면서 사원마다 특유의 차를 만드는 법을 개발하여 전승하였다.
조선초 사대부들은 유학을 신봉하면서 불교나 도교의 사상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김시습은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차를 기르고 차를 법제하여 고승과 대화를 나누었다.
3. 다게에 나타난 차문화
서산대사는 사람을 만나면 차를 권하는 산사의 인정을 다게로 읊었다.
정관일선(淨觀一禪)의 다게에도 차를 권하는 불가의 유풍이 적혀있다.
조주선사의 다풍을 읊은 소요태능(逍遙太能)의 다게도 있다.
이상 세 편의 시에서는 조주선사로부터 시작된 ‘끽다거’의 화두를 실천하던 사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차문화가 다소 침체되었던 조선시대에 면면히 한국 차문화가 이어지게 한 것은 승려들의 공이 크다. 불가에서 참선하는 때에 졸음을 쫒기 위해 차가 꼭 필요하고, 손님 접대에도 차를 반드시 대접함으로써 다선일미의 수양을 실천할 수 있었다.
Ⅴ. 근대 차문화의 중흥과 불교의 공헌
1. 초의에 의한 차문화 부흥
1) 초의와 다산 추사의 만남
조선후기 차문화 부흥은 초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의와 다산의 만남에 다리가 되어 준 사람은 아암 혜장이다.
2. <조선의 차와 선>에 나타난 사찰의 차문화
1) <조선의 차와 선>의 내용
이에이리가 1930년대에 돈차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던 곳과 근처에서 돈차 제다를 했다는 증언을 지금도 여러 후손에게서 들을 수 있다. 보림사에 거주하던 처사가 돈차를 만들어 철주전자에 마시는 것을 보았고 돈차를 몇 개 얻어오기도 했다고 한다.(박용서, <돈차 청태전>, 중앙생활사, 2008, 42~44)
그는 먼저 나주 불회사의 단차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였다.(모로오카는 1939년 <조선에서의 당대 단차의 발견>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차씨 전래 과정과 불회사의 돈차 만들기와 끓이기 등을 흥미롭게 소개하였다.)
2) <조선의 차와 선>에 나오는 제다법 실제
(1) 해남 대흥사 단차 제다법
➀ 찻잎을 오전에 따서 떡시루에서 찻잎이 흐물흐물하여질 때까지 찐다.
➁ 잠시 찐 차는 가마에 불을 넣고 불로 굽는다.
➂ 찐득거리는 진이 나오면, 나무 절구에 넣고 손공이로 찧는다.
➃ 떡처럼 빚어 동글납작하게 만든다.
➄ 햇볕을 쪼이며 얼른 말린다.
➅ 새끼나 볏짚으로 30개쯤 꿰어 종이에 싸고 온돌방의 마른 곳에 둔다.
(2) 나주 불회사의 벽돌차의 유래 및 제다법
➀ 세물차까지 차를 딴 뒤 이용할 수 없는 네물 이후의 남은 잎을 따서 이용한다.
➁ 불회사의 벽돌차는 지름 2.3cm 두께 0.5cm의 크기인데, 중국, 일본에서 만들어진 몽고, 러시아에 수출한 벽돌차는 길이 30cm, 넓이 15cm, 두께 2cm의 크기이다.
(3) 장흥 보림사 부근의 차와 제다법
➀ 단차를 돈차 또는 청태전이라고 한다.
➁ 장흥 단산리의 위경규씨의 집에서 발견된 차의 내력(1938년 11월) 청태전을 ‘차’또는 ‘전차’라고 한다.
➂ 강차 만들 때 쑥이나 그 밖의 식물의 줄기와 잎, 또는 과실 등을 넣는 만드는 잡화법 소개하며, 이는 맛을 돋우고 약효를 증대시키기 위해서이다.
➃ 유치면 봉덕리 이석준 노인(당시 62세, 1938년)의 청태전 만드는 기구로 대나무 테를 이용한다. 지름 6cm, 두께 0.15~0.18cm, 높이 0.48cm의 대나무 테로 만들며, 대나무의 이음새는 깎아서 실로 동여맨다.
➄ 주로 보림사 경내의 찻잎으로 청태전을 만들었다.
3. 기타 사찰의 차문화 전승
1) 범해 각안(1820~1896)
초의 제다법을 계승해 오늘날에 전한 대표적인 승려이다.
2) 금명 보정(1869~1930)
초의 선사의 다풍을 이어간 선사로 유명하다. 그는 다송자로 알려졌는데 다시 80여수를 남겼고, 동다송을 필사하였다.
3) 석전 박한영(1870~1948)
박한영과 한용훈은 한국 불교계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들은 차와 관련된 문헌을 섭렵하였고, 다과회를 열어 대중들에게 차를 마시게 했다.
4) 응송 박영희(1893~1990)
일제 강점기 대흥사에 주석했던 응송 박영희는 차와 관련하여 특별한 승려이다.
응송은 구한말 대흥사의 다도를 이어 현대까지 전승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응송의 차는 뜨거운 물에 다리는 일탕법이다.
Ⅵ. 결론
한국 차문화 발전은 불교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논문은 불교와 차문화에 대해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이다. 참고문헌도 많은 단행본과 논문을 참고한 것 보아서 저자의 수고로움이 표현된 것 같다.
수고하신 노력 덕분에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논문이 지적재산권의 문제가 있다면 알려 주시면 당장 지우겠습니다.
매공 끽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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