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술/명상과 참선

창고-1 평화교육이란 무엇인가?

매공tea 2013. 7. 9. 17:10

이 글은 언제부터인가 내 폴더에서 잠자고 있던 문장이다.

이제 세상에 보내려 한다.

만약 이 글이 저작권의 문제가 되면, 즉시 내릴 것이다.

정유성교수님를 검색하니 교수님께서는 평화에 대한 많은 강의와 교육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육영 20007.8

평화교육이란 무엇인가?

정유성/서강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공존과 상생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문명전환의 소용돌이가 한창이다. 오랫동안 이어졌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사실상 사라졌고, 나아가 정보화, 세계화에 따른 여러 가지 새로

운 사회관계, 삶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사람 살만한 삶 터

는 아니다. 새 세상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그 걸림돌이 되는 이른바 `오래된 새 모

`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점점 더 심각해지는 인종, , 계급차별 등 주류에서 소외된 집단, 개인에

대한 `타자화`의 경향이 그것이다.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총체적인 모순체제가 무

너 진 뒤라 그런지 오히려 이런 오래된 새 모순들이 크고 작게 뒤얽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우리 사회가 특히 그렇다. 아직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옛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터에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안팎에서 엇물려 드는 오래된 새 모순들이 뒤얽혀

우리 사회는 온갖 갈등과 모순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우리 스스로 온 삶터에서부터 존재의 생김까지 세심하게 되돌아보고,

어지고 찢겨진 부분은 드러내고 부딪쳐 이를 극복하고 사람다운 삶을 되살리도록

해야 한다. 결국 우리 안에 `가름``나눔`이라는 `타자화의 문화`를 찾아내고 겪

어 보아, 그 부딪침 끝에 `나눔``섬김`을 바탕으로 한 `고르고 너른 살림`,`서로

살림`의 문화를 가꾸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만남``

사귐`을 통해 함께 자라고 크며 사람다운 삶을 이룩하는 교육의 과정을 삶 한복판

에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이 평화교육의 절실한 필요성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우리 교육은 이러한 싹을 틔울 토양이 없다. 오히려 제도화된

학교교육이 `구조적 폭력`으로서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 특히 무

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 잘못된 제도교육에 갖힌 채 자신들의 삶은 유

보당하고 비정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다. 또 실제로 아이들은 이런

교육을 견디다 못해 학교붕괴다, 교실붕괴다 문화적인 저항을 꾀하고 있다. 이렇게

잘못된 제도에서 우러난 그릇된 의식, 관행으로 교육과 관련된 우리 모두의 나날의

삶이 식민화된 채 일그러지고 뒤틀어지기만 한다. 그러니 그동안 개혁이라고 이것

저것 바꿔보기는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제도교육이라는 좁은 틀에서만 이런저런 기

술적인 개선을 꾀하는 데 머물고 있다. 언제나처럼 거듭 위로부터의 개혁, 밖의 요

청에 따른 개혁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제도교육 안팎에서, 안에서 우러나고 밑으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과정으로

서의 교육실천, 교육운동으로 진정한 교육개혁, 사회변혁을 꾀해야 한다. 이것이야말

로 역설적으로 평화교육의 현실적인 가능성이다. 그러려면 물론 더욱 너르고 크며

깊은 다양한 교육 및 삶의 과정이 마련되어야겠지만 그 첫 단계로 `다름`을 인정하

고 갈등을 드러내며 그것을 부딪치는 교육 및 삶의 과정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다음 단계로는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나눔과 섬김으로 화쟁의 삶을 실천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평화교육의 소극적, 적극적 단계인 공존

과 상생의 과정을 어떻게 마련하고 실행할 수 있는지 몇가지 원론적인 측면과 가능

성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변화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유례없이 경직되고 획일회된 사

회이다. 겉으로는 상대주의니, 다양성이니 그럴듯한 말들이 오가지만 정작 우리 나

날의 삶에서는 여전히 단일한, 획일화된, 절대적인 기준들이 판치고 있다. 이런 기준,

학문, 가치체계들 자체는 이미 흔들린 지 오랜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런 흔들림의 조

짐 때문에 보수적인 집착,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감당할 수

없는 집단이나 개인은 그 분열의 체험을 견디지 못하고 시효가 지나고 박제가 된

가치체계에 매달리는 습성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집착이나 퇴행이 유난히 두드러지니 문제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세계화를 부르짖는 지금까지도 뿌리 깊은 `다름`에 대한

무지, 배타, 그리고 증오이다. 다른 집단, 다른 문화, 다른 민족, 다른 인종, 다른 성에

대해 우리처럼 모를 뿐 아니라 이유 없이 가르고 나누고 미워하고 억누르려는 사람들

도 없을 것이다.

그 가장 뚜렷한 강화의 현장은 아무래도 제도교육일 것이다. 여전히 중앙에서 규

정한 획일적인 제도가 위로부터 아래로 덮씌워질 뿐 아니라 그 경직성은 갈수록 더

해 개인이 이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획일화된 제도교육

을 통과하면 천편일률적인 삶의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들의 이력서

는 하나같이 꼭 같은 틀과 경로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학교를 통한 사회화 과

정이란 획일화된 `사이비 정체성`을 모두에게 덮씌우는 꼴이다.

가뜩이나 획일화된 사회는 이런 교육의 경직성을 서로 부추긴다. 가르고 나누고,

그것을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렇게 끼리끼리 모여 일하고 놀고 살고,

그렇게 형성된 패거리에 홀로 서지 못한 인간들은 매몰되어 집단적인 사이비 정체

로 위안받고, 그것이 싸움이 되고, 상처를 내고,더 심각한 패거리를 만들고...

이것이 아이들 사이에 번지고 또 미래에 큰 짐이 될지도 모를 이른바 왕따문화의

원인이다. 아이들이 바로 이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이런 가름과 나눔은 결국 우리 안에서 우리들 스스로를 거듭 찢고 나눈다. 마땅히

따뜻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가져야 할 자연과 사람이 서로 적대하고 맞서고, 사람끼

리 모여 사는 삶터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터가 되어, 그 안에 사는 우리들은

가름과 나눔으로 자기 스스로와의 관계조차 물어뜯어 피를 흘리며 중음신^들처럼

방황한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지는 못하고 으르렁거리며 더욱 가르고

나누어 제 상처를 깊게 한다.

사정이 이쯤 되니 이제 가름과 나눔을 극복하고 다름과 더불어 함께 살기를 배우고

익히는 일인 공존의 교육은 오늘날 우리 교육에 주어진 무엇보다도 심각한 시대적

요청이 아닐 수 없다.

공존의 교육은 우리 삶의 한복판,삶의 온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공

존의 교육이 학교교육을 가름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교육은 아니다. 공존의 교육은

학교교육이라는 또 다른 나눔과 가름의 틀을 함께 더불어 깨고 학교 자체를 삶터로

되돌리는 일이기도 하다. 공존의 첫걸음은 우리 삶에 스며든,우리 안에 또아리 튼

가름과 나눔을 찾아 드러내는 일부터 비롯된다. 우선 다음과 같은 갈등과 모순의

현장 세 영역을 들 수 있다.

먼저 자연과 공존교육은 기존의 환경교육과는 달리 인간이 자연을 제대로 만나고

사귀지 못하고 서로 적대시하고 대립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현장을 교육의 장으로

삼을 수 있다.

둘째, 곁사람과의 공존교육이다. 인관관계의 가름과 나눔의 모든 현실이 그 현장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경제적인 차별,지역/주거문화의 차별, 성차별, 세대간의 갈등,

문화적인 차별 같은 현실들이 그렇다. 이는 가장 구체적인 삶의 한복판에서 찾을수

록 절실하며 살아있는 교육현장이 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이치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의 갇힌 교육적 상상

력을 기존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갈등과 모순을 찾아내고, 드러내고,

부딪쳐 새로운 만남과 사귐을 체험하려면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학습, 교육 전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말 그대로 삶의 온자리에, 삶의 한복판에서 교육이 이루

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로는 스스로와의 공존교육이다. 이것은 편협한 이기주의, 작은 나에 대한 집착

을 벗고 진정 자중자애하며 자기 스스로를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곁 사람을 섬기고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이러한 자기와의 만남, 사귐의 과정을 필요하다면

종교적인 체험학습과 결합하여 공존교육의 장으로 삼을 수 있다.

이런 공존의 교육을 통해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

다름을 적극적으로 체험하고 또 모색할 수 있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평화교육이다.

이제 소극적인 의미의 평화교육인 공존교육에서, 상생이라는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

교육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그 첫째로는 획일화된 경직된 교육에서 `조금 다르게 살기`위한 교육으로서의 변

화이다. 스스로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삶의 과정을 기획, 실천 할 수 있

도록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탈을 짐짓 체험하는 교육과정도 다름에 대한

만남과 사귐을 위해 해봄직하다. 당장 생활에서의 실천이 어렵다면 문화적인 통로

를 이용해 조금은 낯설게 한 자기인식, 자기표현, 함께 어울리기 훈련 같은 것도 시

도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자신의 힘,곧 자아 성숙도와 정체의 건강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첫 걸음은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나`를 찾는 교육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제 `작은

나에서 큰 나로`나가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찾은 나를 어떻게 더 큰 나로

재구성하고, 홀로 서서 나누고 가를 것이 아니라 섬기고 함께 나눌 수 있나 구체적

인 실천으로 경험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마련해 볼 수이다.

이러한 공존과 상생의 평화교육은 새로운 교육과정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이치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의 갇힌 교육적 상상력을 기존

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갈등과 모순을 찾아내고, 드러내고, 부딪쳐 새

로운 만남과 사귐을 체험하려면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학습, 교육 전반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야한다. 말 그대로 삶의 온자리에, 삶의 한복판에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

도록 해야 한다.

 

^중음신: 사람이 죽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 떠도는 혼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