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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의 만남
- AD. 199년부터 茶를 갖추어 제사 -
차옥덕
한국여성향토문화 연구원장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즉위 7년, 왕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사실들을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서기 48년 7월 27일에 아홉 명의 중신들이 궁(宮)으로 들어가서 수로왕을 뵙고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아직 아름다운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규수 가운데서 가장 좋은 낭자를 가려서 궁에 들이고자 하오니 왕후로 삼아 주옵소서” 하니, 왕은 “내가 이 땅에 내린 것은 하늘의 뜻이니라. 그대들의 염려할 바가 아니라”하면서 유천간(留天干)에게 영을 내려 망산도(望山島)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북쪽으로 오는 배가 있었다. 유천간 등이 망산섬에서 그것을 보고 엉겁결에 횃불을 올리니 배에 탔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뭍으로 내려와 뛰어왔다.
신귀간(神鬼干)이 급히 궁으로 달려가서 이 사연을 수로왕에게 아뢰니 왕은 매우 기뻐하였다. 뒤미처 왕은 아홉 중신들을 마중 보내며 궁에 모셔들이도록 하였으나 배에 타고 있던 왕후는 이에 따르지 않고 “나와 그대들은 익히 아는 처지가 아니니 어찌 함부로 따를 수가 있겠는가”고 하자 다급한 유천간 등이 왕에 이 사연을 아뢰니 왕은 뒤늦게 시종들을 거느리고 궁의 서남쪽 산기슭으로 나가서 휘장을 두르고 그 속에 기다렸다.
이윽고 산자락 끝 별포(別浦)에 배를 대고 왕후는 뭍으로 올라 높직한 언덕마루에서 한숨 돌리면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그것을 폐백(幣帛)으로 삼아 산신에게 바쳤다. 또 시중해 온 잉신( 臣) 두 사람과 노비를 합쳐 모두 20명이었으며 가지고 온 금수(錦繡), 능라(綾羅)의 옷과 필단(疋緞), 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 등(茶種子?)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다.
얼마후 왕후가 왕이 기다리던 자리로 가까이 다가오자 왕은 몸소 왕후를 휘장 속으로 맞아들이고 따르던 일행은 댓돌 아래서 절하고 곧 물러났다.
그런데 왕과 더불어 침전에 든 왕후는 “저는 본디 인도에 있는 아유타국(阿踰 國)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씨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 16세입니다. 지난 5월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 왕의 자리에 앉게 된 성스러운 분으로 새로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아직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고 하시어 저를 그곳으로 가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연으로 저는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 와서 이렇게 용안(龍顔)을 뵙게 된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에 답하기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하여 공주가 올 것을 이미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오” 하였다.
드디어 혼인하고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씩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윽고 8월 1일, 왕과 왕후는 한 연을 타고 중국(오는 도중 대만이나 중국 해안지역에 상륙 추정)에서 나는 갖가지 물품도 모두 수레에 싣고 대궐로 들어오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를 맞은 수로왕이 그로부터 나라의 옛 제도를 새롭게 고치고 나라 안을 잘 다스릴 뿐만 아니라 백성 사랑하기를 아들처럼 하여 그 교화가 엄하지 않았으면서도 위엄이 따르고 그 다스림은 너그러우면서도 잘 이루어졌다 한다. 왕과 왕후의 금실은 흡사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그리고 밝음이 어두움을 짝짓듯 했다고 전한다.
허왕후는 아들 10형제와 공주 자매를 두고 189년 3월 1일에 이승을 떠난다.
백성은 땅이 꺼진 듯한 크나큰 슬픔 속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내고 그녀가 백성을 사랑했던 은혜를 저 버리지 않고자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으로, 비단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으로, 그리고 붉은 깃발을 휘날렸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으로 고쳐 불렀다.
홀로된 왕은 밤마다 베개에 몸을 기대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가 10년 후인 199년 3월 23일에 승하했다. 백성들은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함이 왕후가 돌아갔을 때보다 더했다.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한길이며 둘레가 300보였다. 그곳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 손인 구형왕(仇衡王)까지 신위를 여기서 모시고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는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典)으로 제사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 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매년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 茶(차), 과일 등 여러 가지 갖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년중 5일을 변동하지 않고 기묘년(AD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백30년 동안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다.
그후 신라 문무왕은 끊겨졌던 제사를 다시 지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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