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래 금당 최규용/금당과 끽다래

부산여성 1988년 5월호 에 실린 금당 관련 기사

매공tea 2009. 7. 11. 05:00

끽다래

 

아들 하나 잘 둔 덕에 몇 년째 복사물로만 있던 자료를 파일화 합니다.

이 책은 <부산여성>이라는 잡지에 실렸다고 합니다.

원본이 있는 분은 연락 주세요. 아니면 찾을 수 있는 방편이더라도요.

애쓴 태연이 고마워, 더욱 분발해죠.

 

부산여성 1988년 5월호 - 터주대감 차인 금당 최규용 옹



  항다반(恒茶飯)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진의를 알고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본다. 국어사전조차도 ‘예사로운 일’ ‘일상 있는 일’ 등으로 해석이 되어 있는데 사실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을 아는 사람도 적다.

  이 말은 원래 중국에서 널리 쓰여져 왔는데, 우리나라에 차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기는 신라 때이므로 우리도 그때부터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항다반(恒茶飯)-“밥 먹듯이 차를 마신다.”로 이제 이 말의 제 뜻을 풀어보았다. 그러나 이 말이 지금에 와서 왜 변화되어서 쓰여지는지 의심스럽다. 그런 의문의 하나로는 오늘날 누구나 모두 밥 먹듯이 차를 마시지 않으니까 항다반이 제 본디 뜻을 감추고 ‘별 일이 없는’ 양 잠적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항다반이 사어(死語)가 되어서 국어사전에서도 푸대접을 받고 있으니 이 말의 운명은 기구(?)한 것일까. 아니다 그 말의 본디 모습을 이제 앞에서 찾아주었으니 그 운명 탓을 버리고 그 말이 제 몫을 반듯이 해내는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茶人 錦堂 崔圭用” 이렇게 쓰고 그 옆에다 “恒茶飯人”이라 쓰면 비로소 항다반이 제 이름을 오롯이 찾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실존(實存)의 老茶人에게 그 단어를 접맥(接脈)시켰으니 가히 그러하다 할만하지 않은가.

  차를 즐기는 일을 밥 먹듯이 하는 분. 港都 부산뿐 아니라, 우리나라, 아니 이웃 일본이나 대만에서까지 널리 茶人으로 이름이 나 있는 분. 오늘도 송도의 봄바다 기운을 한껏 맡고 있는 <錦堂茶寓>의 대청마루에서 차를 마시고 계실 錦堂 崔圭用翁 어쩌면 지금 멀리서 객(客)이 와서 함께 차를 마시며 차와 인생을 애기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초탈한 茶人


  그 분에게 ‘향토의 터주대감’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은 차라리 어울리지 않는다. 터주대감이라는 말 자체를 이미 뛰어넘고 있으니 그냥 자유인 자연인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분은 이미 차를 통해서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는 초탈한 삶을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1978년 봄에 ‘錦堂茶話’라는 귀한 책이 부산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당연히 錦堂 崔圭用翁. 내용 전편에는 금당옹의 ‘愛茶半生記’라 할 정도로 이 분의 茶人生의 편린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우리나라 미의 극치인 도자기를 비롯 우리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으면서 국립박물관장까지 지냈던 故崔淳雨씨가 금당옹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 전문을 옮겨보기로 한다.


       차와 벗해서 늙어가는 老境의 조촐함이야 말로 동양의 선비가 지니는 으뜸가는 아름다 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뜻을 젊어서부터 차에 마음을 기우려 한 세대를 겪어 온  錦堂大雅(금당대아)는 지금 부산 송도에

       의젓한 茶寓를 두고 老境을 지내는 복 받은 분이다.  그 동안 錦堂은 예로부터 이름 난 국내의 茶積을 두루

       찾아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더구나 草衣禪師의 유적을 밝히기에 힘을 써 왔다. 일찍이 중원에 

      머물었을 때는 고대로부터 근세의 이르는 다적과 다향을 돌아보았으며 일본의 다도도 속속들이 눈에 익혔었다.

      이번 錦堂이 그 동안 茶를 즐기면서 얻은 우리나라 茶의 전통에 얽힌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하고 또 茶와 더불어

      빚어진 茶話들을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된 것은 우리 茶의 명맥이 거의 기진하려는 이때에 좋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차의 길이란 곁에 있는성 싶어도 그 길에 나서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길이 아득한 듯싶은 사람에게도 바로

      잡혀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말하면 茶의 길이란 자신의  마음속에서 트여져야 되는 길일 뿐 더러 그 길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즐거움에 곁들여 눈으로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안목의 소유자에게 열려진 문이라고 할 수 있다.

      錦堂은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듯싶으니 도시 복 받은 분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금당옹을 알리는 이 지면에서 이 보다 더 간결하고 바른 소개가 달리 더 없을 것이다.


금당다우에서 茶와 人生을


  금당옹은 1903년에 통영에서 출생. 망국의 일제 치하에서 소년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나가기 위해 약관 18세에 일본으로 유학. 조도전(早稻田)대학에서 당시 신학문인 토목학(土木學)을 공부했다. 그 이후 10여년을 중국대륙에 머물며 토목관계 일을 보는 한편 中國茶의 명산지인 江蘇省 蘇州를 비롯 無陽, ?湖, 浙江省   ----- 이하 생략  (자료 중간 없음)   -----


을 보았다고 한다.


금다회(錦茶會)로 茶의 맥을


  오늘날 외래문화의 급속한 유입으로 인해 우리의 식생활이 과거와 엄청나게 달라져 가고 있다. 거기다가 비싼 값의 돈을 들여 수입해다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식품들 가운데 건강을 해치는 가공식품들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 특히 커피는 점점 더 애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인데 이 또한 비싼 값을 치르고 수입해다 쓰고 있으니 예사 일로 보아 넘길 수 가 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젊은 사람들이 커피에  중독이 되어 하루에도 몇 잔씩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금당옹은 큰 걱정을 한다.

  이제까지 일관된 삶을 다인으로 사시면서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일일이 깨우치게 하는데 소홀함이 없는 옹으로서는 그런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금당옹은 이미 70년대 초부터 실천 차를 생활 가운데 널리 보급하기 위한 방편으로 금다회(錦茶會)를 조직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차회를 통해 우리 차의 전통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금당옹은 정신이 맑아야 모든 일이 정도(正道)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늘 강조하고 있다. 정신이 맑지 못하면 사(邪)가 끼이게 되고 그런 사가 낀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정이나 사회 국가가 발전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도 말씀한다. 특히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여러 가지 나쁜 질서가 생겨나는 이유도 정신이 불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차의 필요성이 비로써 그런 현상들 가운데 접근되기를 희망하는 금당옹.

  차를 통해서 어떤 경지에 이르는 길만이 차를 아끼는 이유가 될 수는 없고, 차를 통해서 심신이 건전하게 되어진다면 그 이상도 바랄 것이 없고, 차의 존재가 바로 그런 자리에 있기를 평생을 통해 이제까지 몸으로 보여주시는 금당옹.

  금당옹은 누구나 좋아하고 특히 젊은이들을 반겨준다. 목소리에 힘이 아직 남아있고 어떤 이상 종교 철학도 다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한다. 젊은이들에게 이미 70년대부터 중국대륙에 대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기를 부탁할 정도로 국제 정세의 흐름에도 앞서 있다. 그 만큼 젊은이들에게 넓은 세계관을 심어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금당 옹에게 중국대륙에 관해서 물어보면 거침이 없다.


茶와 부부도(夫婦道)


   금당 옹을 애기하는 자리에서 부인 민숙인여사를 빼놓을 수 가 없다. 7순이 넘으신 민여사님 또한 당대에 보기드문 다인이다.

  고려민예사를 옹과 함께 이끌어 오면서 민여사의 손끝을 거쳐나간 우수한 민예품들에 대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민속공예 세계의 대모(大母)가 바로 민여사이다.

  금당다우의 옹과 함께 언제나 사람들에게 다인으로서의 품위를 보여주는 민여사. 옹과의 만남은 한편의 아름다운 詩와 같다고 한다.

  옹과 민여사의 연세의 차이는 10년이 넘는다. 민여사가 진명여고 학생이였던 17세 때. 금당옹은 국립토목부에 근무하는 유망한 청년 토목기사로 29세. 금당옹은 민여사의 오빠와 막연한 친구사이로 수시로 민여사 댁을 드나들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민여사가 여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여를 지켜보면서 보호를 해 주었다고 금당옹은 말씀한다. 일찍감치 민여사를 신부감으로 낙점해 놓았다고 한다. 민여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빠의 친구로 만 스스럼 없이 대했을 뿐 어느 날 신랑후보가 금당옹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러     ----- 이하 자료 없음   -----

'끽다래 금당 최규용 > 금당과 끽다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우다경연구회 회보 창간에 즈음하여   (0) 2009.07.11
陸羽茶經會報 창간호 목차  (0) 2009.07.11
금당 최규용의 차 사상  (0) 2009.06.18
육우다경  (0) 2009.06.16
현대인과 차  (0) 2009.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