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공 차 한잔 마시다/차 마시는 사람들

근대차인 - 김운학-마루

매공tea 2008. 11. 29. 11:53

김운학 [金雲學, 1934.1.23~1981] 


문학평론가 · 승려.  문학작품을 통하여 불교 사상을 추구하고, 불교정신에 입각해서 현대문학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로 취임, 불교총무원 교육국장, 《불교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불교문화예술원 상무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본명  강모

활동분야  문학·불교

출생지  전남 영암

주요저서  《삼매의 언어》 《공자의 문학관》 《삼매론》


오대산 수도원에서 동양철학을 연구하고, 조선대학교와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1966). 1969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마자와[駒澤]대학에서 수학, 동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공자의 문학관》 《삼매론(三昧論)》 등으로 《현대문학(現代文學)》의 추천을 받아 문학평론가로 데뷔하였다. 문학작품을 통하여 불교 사상을 추구하고, 불교정신에 입각해서 현대문학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근현대 한국불교를 움직인 명저 50선 - 법보신문

21. 김운학스님의 <신라불교설화연구>  가 있습니다.



광복60 불교60 기획   불서 중에

신라불교문학연구, 김운학스님, 1976년 현암사.

향가의 불교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신라 불교 정체성을 찾은 책. 기존 국문 학자 들의 관점과는 다른 입장에서 향가를 연구 분석하고 있다. 향가에 대한 불교 시각에 중점을 두고 있다. 



'喫茶禪道 點茶禪法 茶事觀法'


'喫茶(끽다)는 禪道(선도)를 宗(종)으로 한다.

點茶(점다)는 禪法(선법)에 의해서 自性(자성)을 解(해)하는 공부다.

茶事(다사)는 方便知見(방편지견)을 點茶(점다)하는 일에 의탁해서 본분을 證得(증득)하는 觀法(관법)이다.'

  - 寂庵 宗澤(적암 종택) 스님의 '禪茶錄(선차록)'- 중에서


 차 공부를 하면서 최초로 들었던 말이 '茶禪一味' 였습니다.

 오랜동안 절 집안을 드나들었던 터라 불립문자 '선'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차와 선이 하나라는 말은 알듯 모를듯 했습니다. 막연하게 하나라고 하지만 단박에 깨치는 '돈오'가 있고 수행을 거쳐가는 '점수'가 있듯이 근기가 약한 사람이라 단박에 깨칠 방도는 모르겠고 앉은 자리에서 시원하게 알 도리라 없어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점차 경험이 쌓이고 공부가 더해지면 언젠가 그 뜻이 들어오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러한 갈증을 해결해준 글귀를 만날 수 있었는데, 1981년도 판 김운학 스님의 '한국의 차문화' 라는 책이었습니다. 몇년 전 다시 복간되어 나와있습니다만,  '선차록'의 글귀를 대하는 순간 앞으로 어떻게 차를 해야 할 것인지가 확연해졌습니다. 당장에 전문을 읽고 싶어 책을 수소문했지만 서점에는 없었고 어렵게 학교 도서관에서 찾은 책은 일본서라 번역본이 없었습니다.

 일어에 문외한인지라 애석했지만 일서라도 카피해두자 싶어 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아 에포 10장 정도입니다. 아무튼 이대로만 하면 '차'의 본성을 알고 궁구하는 일에 소홀히 함이 없을 줄 압니다.

 끽다, 점다, 다사는 나누어질 수 없이 어울어지는 하나의 모습입니다. ^^*

[출처] 선차|작성자 차미소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21)차를 알 수 있는 책들


산이 오랜만에 조용히 쉬고 있다. 마치 구멍이 뚫린 듯 퍼붓던 눈발이 뚝 끊기자 세상은 어마어마한 적막 속에 잠겨 있다. 길이 끊어지자 인적도 함께 끊긴 탓이다. 오랜만에 산속의 살림살이도 쉰다. 지난 가을 모아두었던 바짝 마른 장작 몇 개를 아궁이에 넣는다. 그리고 눈을 한 움큼 떠서 돌솥에 넣는다. 이른바 ‘설차’를 마시기 위함이다.

돌솥이 달아오르자 눈을 한 움큼씩 집어넣는다. 마치 만년설이 허공으로 녹아들 듯 돌솥 속에서 녹아든다. 찻물이 끓고 하이얀 백자찻잔에 붓는다. 이른바 ‘눈백차’다. 부처님과 삼라만상에 그 첫잔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바친다. 물이 끓는 소리 그리고 백차 한잔. 삶이란 아주 가끔식 나를 멈추는 행복속에서 사는 것이다. 나를 멈추면 그속에 비로소 완벽한 행복이 존재한다. 그러나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이 과연 나를 멈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우리 곁에는 차를 공부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다서(茶書)들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차에 관해 다양한 책들이 우리들에게 선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다구에 관한 것, 차에 관한 것, 중국·일본차에 관한 것. 그뿐만 아니다. 차에 관한 잡지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차의 대중화가 불러들인 문화적인 현상이다. 차문화는 현재 급속하게 복원 중이다. 또한 다양한 문화적 경계에 접근중이다. 웰빙 그리고 명상·요가 등 다양한 영역으로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차에 관한 출발은 육우의 (다경)(茶經)으로부터다. 전문(全文) 약 7000자(字)로 육우가 편찬한 (다경)(780년쯤)은 당대(唐代)와 당대이전의 차에 관한 과학적 지식과 실천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중국 차문화의 기초를 확립했다. 1200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온 (다경)은 단순히 차의 종류나 마시는 방법을 말한 표면적인 사항을 정리한 책이라기 보다는 ‘차의 정신’을 중요시하고 있다. 육우가 확립한 다학(茶學), 다예(茶藝), 다도(茶道)의 사상과 그것을 정리한 (다경)은 시대를 초월한 차의 명작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 1123년 고려에 왔던 중국 사신 서긍이 고려에 머물면서 펴낸 견문기행문 ‘고려도경’ 제31권. 이 절목에 차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적혀있어 당시의 차 문화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다경)은 3권 10장 규모로 1장에는 차의 근원, 2장에는 차의 연장, 3장에는 차 만들기, 4장 찻그릇, 5장 차 달이기, 6장 차 마시기, 7장 차의 옛일, 8장 차의 산출, 9장 차의 생략, 10장 차의 그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3차례 정도의 수정을 거쳐 교연스님과 안진경의 후원으로 간행된 (다경)은 당의 피일휴, 소의 진사도, 명의 노팽, 진문촉, 장예경(발문), 동승서(육우찬), 이유정, 서동기, 청대에는 증원매, 민국시대에는 상락스님 등이 후대에 서문을 썼다. 현존하는 (다경)은 4종이 있다.

주(注)가 있는 것으로 이른 것이 남송대 좌규본(左圭本:백천학해본)이고, 주가 없는 것으로는 (백권(百倦)의 설부본)이며 하나의 증본으로 다기권(茶器卷)을 다구도찬(茶具圖讚)에서 추가한 명의 (정화은본(鄭火恩本))(선화당본(宣和堂本))이 있다. 넷째는 원문을 가감한 삭절본(削節本)으로 명대의 (왕기본(王圻本))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경)이 전해졌거나 간행되었겠지만 그 흔적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다.(다경)역시 고대 다서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다경)간본은 1273년 좌규가 (백천학해(百川學海))의 (임집(任集))에서 다른 다서와 함께 (다경)을 판각한 (백천학해본)이 있는데 주가 첨부되고 있다. 명대의 간본도 있다. 다경선화당본(宣和堂本)은 명대(1368~1644)에는 세종 가정 연간에서 신종만력 연간에 걸쳐 (다경)에 관한 첨삭이 있었다. 원본에 기타자료를 부가한 (다경외편)중 하나로 다기권을 (다구도찬)에서 추가하여 마치 정문(正文)인 것처럼 만든 것이 바로 (선화당본)이다.

육자다경(陸子茶經)과 건안다록 역시 눈여겨볼 만한 다서중 하나다. 청말 서탑사의 주지인 상락스님이 간행한 가장 완비된 (다경)이다.1792년 (당인설회본)에 (다경)이 함께 수록된다. 건륭연간에 경릉서호의 왕자한이 음운을 교정한 (다경)을 증각했다.

건안다록(建安茶錄)은 송나라 정위(962~1033)가 지은 책인데 총 3권으로 되어 있으며 ‘건안 공다소’의 차밭, 차공자, 기구, 차따기, 제다법을 기록해 놓았다. 중국 지배계층과 일반 서민들의 차생활을 알 수 있는 다서들도 있다. 황제의 다도를 자세히 그린 (다록)과 (다소)가 그것이다.

먼저 다록은 송나라때 복건성 건안동쪽에 있는 봉황산의 산록에 ‘북원’이라 부른 차밭을 관리하던 채양에 의해 저술된 것이다.

당시 황제는 차에 관한 의문을 채양에게 하문했다. 채양은 황제의 하문에 답하기 위해 차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묶어 바쳤다. 그 책자가 바로 (다록)이다. 채양은 당시 차제법과, 차의 품평 그리고 황제의 다도를 상세하게 저술했다

이에 비해 다소(茶疏)는 명나라 사람 허차서가 17세기 저술한 자신의 차 체험기 성격을 띤 책이다.(다소)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어 관련된 이야기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다소)의 서문을 쓴 요소현 글에서 그 기록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다.

“병신년(1596년)에 나는 허차서(연명)와 함께 용정을 여행하며 약 열흘간 송사에서 침식을 함께 했다. 그때 승사에서 제공해주는 신차(新茶)를 즐기면서 고담(古談)을 나누었다. 몇해가 지나 허차서가 나를 찾아 그가 저술한 (다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을 어보고 허차서에게 말했다.

육우의 (다경)이후 그 뒤를 이어받는 것 없이 세월이 흘렀는데 이것이면 육우의 익우(益友)가 되겠다. 군의 문장이 한위의 문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어서 육우가 고개를 숙일 것이다. 허차서가 말을 받아 제멋대로 사는 놈이 자기 멋대로 적어 놓은 것인데 육우의 제자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고 말했다.” (다소)의 가치는 자신이 체험한 차에 관해 논(論)한 것이라는 데 있다.

초의스님의 (다신전)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만보전서(萬寶全書)도 있다.(만보전서)는 청나라 모환문이 엮은 백과사전으로 초의스님은 1828년 칠불암에서 (만보전서)의 채다론(採茶論)을 필사해 (다신전)이라 붙였다. 만보전서의 채다론은 명나라때 장원이 지은 (다록)을 인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 다서들도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의스님의 (동다송)(다신전), 한재 이목의 (다부),(고려도경)등이 그것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은 고려 인종원년인 1123년 6월13일 송사 노윤적, 부사 부묵향을 따라 고려에 온 서긍이 한달 동안 고려에 머물면서 지은 견문기행문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갖가지 풍물을 그림과 문장으로 엮어 냈다.

총28문 3백여항으로 분류되어 있는 (고려도경)은 1226년 금나라가 송나라 수도를 함락시켰을때 정본이 불타 없어졌으나 인하 조씨 소산당에서 인각해 간직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고려도경) 목록 31권 ‘다조’(茶俎)라는 절목에 당시 우리나라 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차는 맛이 쓰고 떫어서 구미에 당기지 않으며,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사단차(龍鳳賜團茶)는 중국에서 진상받은 것과 상인이 수입해서 판 것들이 있었는데 차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의 차들을 즐겨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차 도구 중 찻잔은 천목(天目)찻잔과 청자찻잔을 쓰고 있는데 청자 찻잔은 비취색과 같다. 또한 은으로 만든 차 화로 등은 중국 것과 비슷하다.

고려 사람들이 차를 어떻게 마시고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잔치를 할 때다. 먼저 정원에 차를 달여놓는다. 그리고 연꽃모양의 큰 주전자에 차를 담아 손님들에게 “차를 고루 고루 잡수시오. 지금 마시지 않으면 차가 식어 냉차(冷茶)가 됩니다.”라고 안내방송까지 했다.

또한 방안에서 잔치를 할 적에는 홍사포(紅沙布)위에 다구를 놓은 다음 붉은 보로 덮어놓는다. 하루에 세 번씩 차를 마시게 하되 사람이 많아 차가 떨어지면 차관에 탕수만 부어서 차를 마시게 했다는 세밀한 기록도 보이고 있다.

이밖에도 제6권에 연영각에서 잔치를 베풀 때는 차와 정자와 청자 찻잔을 갖추었고, 제26권 관회(館會)절목에는 왕궁사연(私宴)에 골동품과 고완·법서·명화·이화와 좋은 차등을 벌여놓게 했다, 제27권 ‘향림정’(香林亭) 절목에는 무더운 여름 향림정에 소풍을 가 갈증을 해소하기위해 달여온 차를 마시고 놀았다는 기록 등이 있다.

(고려도경)은 고려시대 우리 차 문화의 일단을 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다산 정약용의 저서로 알려진 (동다기)등이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효당 최범술스님의 (한국의 차도), 금당 최규용 선생의 (금당다화), 김운학선생의 (한국의 차문화), 응송 박영희스님의 (동다정통고)등이 있다.

우리 차인들은 모두 다예, 즉 다도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 먼저 차에 대한 정확한 공부가 필요하다. 책을 통해, 강의를 통해 차에 대한 개괄적인 인식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그 체(體)에 맞는 용(用)으로써 차의 진정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일지암 암주

 


이덕리와 《동다기東茶記》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7) 세사발 마시면 득도할 수 있으니…

겨울을 부르는 바람이 제법 차다. 일지암 뒤란은 지금 매우 풍성하다. 두륜산 곳곳에 버려진 고사목을 지게에 지어다가 장작으로 사용하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놨기 때문이다. 일지암 초당도 마찬가지다. 일지암 초당은 매년 한 차례씩 삭발을 하듯 지붕을 초가로 이어야 한다. 인근 동네 사람들이며 남천다회 식구들과 함께 작업할 튼실하고 예쁜 볏짚단을 잔뜩 쌓아놨기 때문이다. 하얀 차꽃을 보며 겨울을 맞이하는 이맘때가 되면 괜히 설레는 것은 바로 이같은 풍성한 살림살이 때문이다.

차를 가꾸며 일상을 노동으로 가꾸는 그런 삶속에는 세속의 거친 욕망이 숨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차란 그런 점에서 바로 우리의 삶덩어리 같은 것이다. 음다, 즉 마신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육지음’에서는 새는 날고 짐승은 달리고 사람은 입을 벌려 말한다. 이 셋은 함께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먹고 마시면서 살아간다. 마신다는 것은 의미가 참으로 깊고 멀다. 목이 마르면 장을 마시고, 근심과 번뇌를 벗어버리려면 술을 마시고, 정신을 맑게 하고 잠을 깨려면 차를 마시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당나라 유효작은 차 마시는 것이 마치 잘된 쌀밥을 먹는 것과 한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유효작은 ‘진안왕으로부터 군량미등을 받고 사례를 올리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서를 전하는 이맹손이 교지를 선포하고 쌀 술 오이 죽순 김치 말린고기 식초 차 등 여덟 가지를 내려주었습니다. 술의 향기가 신성의 것보다 향기롭고, 운송의 것보다 맛있습니다. 물가에서 마디를 뽑은 죽순은 창포와 마름의 진미보다 뛰어납니다. 보내주신 차를 마시면 쌀밥을 먹는 것과 같이 몸에 이롭습니다.”

차의 살림살이는 바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쌀밥처럼 중요한 것중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의 다도는 비슷하다. 일본의 선승으로 불리는 센가이기본은 ‘다도극의’에서 “다도는 마음에 달린 것이지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며, 기술에 달리는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마음과 기술이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언제나 일미(一味)가 드러난다.”고 했다. 중국의 차문화는 매우 광범위하다. 문화혁명의 거친 숙청의 바람 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수천년을 이어온 차문화가 중국인들의 유전자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차인들은 차의 ‘마음’보다는 ‘기술’을 강조했다. 찻물을 20등급으로 나눈 점(장우신의 전다수기), 차 중에 용원승설을 최고로 치는데 그 값이 무려 1만전이나 되는 것도 있다(조여려의 북원별록). 장사에서 생산되는 다구는 정교하기가 천하의 으뜸이어서 한 세트에 백금 200 내지 500성이 들었다(주밀의 계신잡식), 명나라 세종 가정 연간에 경덕진에서 생산된 성화투채배는 그가격이 무려 10만전에 달했다(제경경물략)고 적고 있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중국에서 다법은 주로 기술과 외형의 완성에 치우진 형식주의가 대세를 이룬 것 같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차도는 종교적 영역과 결합하면 새로운 꽃을 피웠다. 물질적인 존재인 차가 종교라는 순수한 정신적인 영역과 교감하며 비로소 하나의 문화로 변화된 것이다.

중국 차도의 핵심도 역시 ‘다선일미’다. 그런 점에서 선은 차의 날개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의 본성이 고요하고 사색적이고 이지적인 성품 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년 사계절을 윤회하는 차의 변화 자체가 바로 진정한 선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의 차문화가 하나의 차문화로 격상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원오극근선사가 언급한 ‘다선일미’에서부터 비롯된다. 다선일미는 그후 차는 단순한 음료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의 마음과 문명을 담아내는 우주적인 그릇으로 확대 재편된 것이다.

한 잔의 차는 삶과 죽음의 문제, 심(心)과 색(色)의 문제, 사유와 존재 등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생리적 필요에 의한 음료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조주 스님의 유명한 공안인 ‘끽다거’는 그같은 변화를 너무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중국의 선문에서 차의 발전은 수행에 도움을 주는 특수한 효능에서부터 시작해 손님 접대까지 하나의 완전하고 엄숙한 다례의식으로 발전했다. 선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관념의 일치성, 즉 차와 선의 본체와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했고 그것을 선과 결합시켜냈다는 점이다.

교연 스님은 “세 사발 마시면 득도할 수 있거니 왜 하필 마음썩이며 번뇌를 깨닫는가.”라고 하고 있다. 교연 스님의 말은 조주 스님의 ‘끽다거’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조주 스님은 끽다를 일상생활에서 자기를 초월하는 깨달음으로 이끌어냈다.‘차선동일미’에서 밝히고 있듯이 “차는 곧 선이다. 선의 맛을 모르면 차의 맛도 모른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이다. 다선일미는 그런 점에서 바로 지혜의 경계다. 지혜가 없으면 일상에서, 수행에서 그 어떤 해답도 얻을 수 없다. 다선일미 곧 중국 차문화를 넘어 중국문명의 밑바탕이 된 것이다. 중국 선종 차문화의 물적 토대를 한 단계 격상시킨 스님은 바로 저 유명한 마조도일 선사다.

마조도일 선사는 8세기 중엽 중국 강서성 봉신현 백장산에서 ‘백장청규’를 제정했다. 백장청규의 핵심은 바로 노동과 함께 어우러진 선수행에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청규는 ‘농선병중’의 사상을 담고 있다. 농선병중사상에 입각한 선문의 생활방식은 자급자족으로 전환시켰다.

당시 사원경제의 핵심은 바로 차 농사였다. 그때부터 스님들은 수행을 하며 직접 차를 재배해 사원경제의 생산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의 명차 대부분이 사원차인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탄탄한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중국 선문의 차문화도 미학적 승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불가에서 행하는 행다의식과 다구들이 독자적으로 등장했고 그에 맞는 자연스러운 직책도 정해졌다. 그런 차문화 속에서 성장한 선사들은 대대로 다사(茶事)와 다례(茶禮)에 정통했다.


불교의 선문에서는 사찰의 차예절이 하나의 다도로 정립돼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다도로 정립된 사찰의 다도는 순서와 안배가 매우 정밀하고 상세했다. 차 예절 전문 담당자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등급과 절차를 두어 서로 다른 규모로 행해져 왔다는 점을 볼 때 수준 높은 차문화를 영위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선차록’의 기록은 이같은 사실을 잘 입증한다.

‘차는 곧 깨달음의 극치’라고 설파한 남종선 선승들의 청규였던 ‘근수백창청규’에는 “총림에서 능한 사람을 참두로 삼는다. 참두는 대중을 인솔하여 객사로 가서 위의를 갖추고 문의 오른편에 줄서서 잠시 인사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객은 즉시 안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참두가 말한다.‘오늘 선사들의 참 모습을 뵈오니 매우 복이 많습니다.’ 지객이 말하길 ‘이렇게 먼길 와주시니 저희 산문에서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차를 마시면서 사찰의 내력을 묻는다. 이윽고 곧 일어나서 차대접에 대해 감사인사를 하고 돌아온다.”고 적고 있다.


선종에서 형성된 다례와 다연은 엄숙하면서도 담백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학적 의미와 예술적 정신적 경계를 지니면서 중국의 차문화를 이끌어냈다. 다례 다의 다연에서는 점차 투차 분차를 통해 미(美)의 형식을 보고 선의 정신을 깨닫고 결국에는 다선일미의 지혜까지 증득하는 것이다.

중국 차도의 핵심이랄 수 있는 ‘다선일미’는 중국의 차문화가 지닌 정신적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즉 차가 선종의 의미를 충분히 담고 선의(禪意)를 깨닫는 지혜의 경지에 이르게 하여 차와 선이 진정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차는 바로 평상심의 적용이며 체현이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워 그 어떠한 신비감도 없는 것이다. 차가 있음으로써 날마다 좋은 날이요, 날마다 평화스러운 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바로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교의 진리추구방향

I. 불교의 진리 추구 방향

1. 진리 추구 자세

종교의 종류에 대한 형태를 분석한 보고에 의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심히 읽어보면서 나의 종교적 성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가 "청원태" 인데 이는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스스로가 믿는 절대자에게 구원하는 형태로써 대부분의 '신'을 믿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취하는 형입니다. 물론 신 중심 사상이 아닌 불교에서도 상당수 불교신자도 이에 포함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희구태" 로써 세상의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정진해 나가는 형태입니다. 현재 깨달은 내용이 궁극의 진리인지를 각 법상의 단계마다 재검증해 나아가는 형으로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깨달은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준비된 수행자를 말합니다.

셋째로 "채주태" 로써 진리를 증득하여 궁극의 진리에 머물러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부처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사람들이 진리를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가 궁극의 진리를 증득하였다고  착각하여 그 누가 말을 해도 마음에 문을 열지 않고 자기가 최고라고 하는 부류의 수행자도 물론 포함되죠.

이 순간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지내왔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선재동자와 같은 "희구태"로써 자세로 진리를 깨닫고자 정진 수행하고 있는지를......

2. 진리로의 접근 방법

법화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일대사 인연이라고 하십니다.

"부처가 출현함은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와 똑같은 지견을 갖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누누이 강조하시고 깨달음의 결과에 대하여는 영원히  묻어주시고, 길을 따라 정진 수행하여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출가하시게 된 배경도 그렇고 육사외도를 스승으로 모셔 가면서 고행을  하신 인연도 그렇고, 고락(苦樂)의 극단을 버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사실은 먼 옛날 이미 깨달음을 얻으시고 우리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싣달다 태자가 세속적인 모든 행복을 구족 하였지만, 결국 출가를 하신 뜻을 자세히 참구해 볼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성문 밖을 나가 생노병사의 모습과 수행자를 보시고 출가를 하신 뜻에 이미 부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첫 번째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즉 우주의 실상과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보다는 우선 현실적으로  괴로운 생노병사의 연기를 깨달아  이로부터 해탈해 나아가라는 뜻을 먼저 비추고 계십니다.  (한글 아함경 35쪽 ~64쪽)

잠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왕사성 가는 길의 비유를 읽어보면서 부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부처님은 왕사성 가는 길에 대해서 가는 길 자체를 가는 순서대로 말씀하십니다. 중생들에게 왕사성 가는 길을 순서대로 가르치신 비유의 참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왕사성 가는 길을 가는 순서대로 가르쳐 주어도 가고 못 가고는 제각기 비구의 행에 달려있다"라고 합니다..  이하 생략........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우리들에게 해결하라고 하시는지를 다시 한번 만동자와 화살의 비유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먼저 해결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질과, 깨달은 후의 결과를 먼저 알아보려고 할 것인가? 이는 마치 왕사성 가는 길을 익혀 왕사성에 가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왕사성을 먼저 알려고 노력할 것인가와 같습니다.

다음의 불교 석학들의 글을 일부 읽어보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불교의 원시경전은 아함경이며, 그 중에서도 장아함이 제일 앞에 위치한다. 그런데 이 장아함을 볼 때 그 제일 처음에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거 일곱 부처님의 탄생.출가.수도.항마.성도.전법륜.열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종교에서는 우주론이 설해질 장소에 불교는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가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론적 신화에 해당시킬 수 있는 것은 세기경(世紀經)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경은 장아함의 제일 끝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세기경은 남방불교의 불전에는 수록되어 있지도 않으니 이것은 그 경전의 성립이 매우 늦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만큼  불교에서는  중요시되지 않았던 내용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처님은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어의 해설을 좀처럼 베풀려고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처님 당시에 만동자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불만을 갖고 있었다.

1)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한가,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2)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가.

3)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4) 여래는 사후에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이에 대한 석학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 열 네 가지 문제는 분명히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관련된  것들임을 볼 수가 있다.

1)과  2)는 세계의 시간적.공간적 성질에 관한 것으로서 종교의 우주론에 관련되며,

3)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론에 관련되고,

4)는 그러한 인간이 깨달음을 열었을 때의 소식을 묻고 있는 것으로서 생활론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동자는 이러한 문제를 내걸고 만일 부처님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해주시지 않으면 수도 생활을  버리고 부처님 곁을 떠나겠노라고 다그치신다. 그는 분명히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번민하고 있었으며 그 해결을 부처님에게서 구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떤 답변을 해주시고 계실까. 뜻밖에도  부처님은 만동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실 뿐이다.

‘만동자여, 내가 일찍이 너에게 그런 문제를  답변해 주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너 또한 내게 그런  답변을 듣겠다는 조건 아래  내게 출가했던 것인가.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네 이제   내게 그런 부질없는 항변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네가 제기한  그런 문제를 내가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그것을   너에게 설명해 주고  있노라면 너는 그것을 다 듣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비유하건대 여기 어떤 사람이 독무든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이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화살을 뽑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고집하여 말하되,  화살을 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주소는 어디인지  등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고 하자. 또는 그 화살이 나무로 만들었는지  대로 만들었는지 뿔로 만들었는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고 하자. 또는 화살촉이  쇠로 되었는지  돌로 되었는지  뼈로 되었는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뽑지  않겠다고 하자. 그  사람은 그것을 채 듣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니라.

너의 질문 또한 그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너의 깨달음과 지혜와 해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나니, 네가 성급하게 알고 행해야  할 바는 너의 현 존재가 괴로움이라는 사실과  나아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이니라.’

중아함(권 60)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대해서 부처님은 답변을 회피하고 계시는 것다. 그래서 이 열 네 가지 질문을 불교에서는 '무기(無記)'라고 한다. 그러한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부처님은 언제나 침묵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a. 불교의 진리관, 고익진. 김운학. 목정배 공저, 경서원 1979)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b. 전유경 : 중아함경 제 60권, 한글아함경 290쪽~296쪽 )

c. 불교의 체계적 이해, 새터출판사, 고익진 지음

 불 교 문 학


불교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와 문학을 이해해야 한다.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문학이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허구이다.

그렇다면 불교와 문학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언어라는 공동의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를 이용하는 방식은 또 다르다. 종교는 언어를 수단으로, 문학은 언어 자체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불교문학을 규정하는 범위가 다르게 되는데, 크게 세 가지의 관점으로 얘기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불교 경전 및 부처의 가르침에 관계되는 저작물 일체를 불교문학으로 보는 경우로 불교와 문학의 한계를 정할 수 없게 되어 문제가 생긴다.

두 번째는 불교적인 것을 표현한 저작물을 말하는 데, 첫번째 것과 유사하지만, 여기에는 불교경전과 불교창작문학작품만을 포함한다.

세 번째는 불교문학을 순수하게 문학의 영역으로만 보고 문학 형식에 불교적 사상을 담고 있는 창작물만을 말할 경우인데, 이 경우에 경전은 소재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이며 그 자체로서의 특성은 약하다.

이상의 세 가지 관점을 통해 불교문학을 정리해 보면, 불교경전문학과 불교창작문학을 불교문학이라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종교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불교문학 역시 불교의 진리를 대전제로 출발하여 작가의 상상력과 문학적 향기가 더해져 불교 정신이 구현될 때, 문학을 도구로 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알게 모르게 불교의 향기가 스며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선   시

선시는 선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해낸 것인데, 사실 선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로, 어떤 언어나 문자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체의 형식적인 틀을 거부한다. 어떤 형식의 틀에 갇히면 이미 본래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선의 세계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우며, 단지 마음으로 마음을 깨닫는 증득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언어를 빼면 달리 의사소통의 길이 없기 때문에 문자를 통해 뜻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적인 선문학에 대한 연구는 김운학(金雲學) 스님의 ‘불교문학의 이해’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후 선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오면서 국문학의 새로운 입장을 열어갔으며, 선문학은 문학적 기교보다 선의 심오한 내용이 더 우선되어야 했다. 그 심오한 내용 속에서 문학적 기교가 흐르는 물처럼 자연적으로 유출되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소   설

불교 소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불교의 사상을 담고 있으면서 일반적인 소설의 형태를 취하는 창작 작품들이다.

인간 구원의 수행적 삶이 불교의 방법론이라면 문학이 지향하는 세계 또한 그와 같은 것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문학의 포괄적 주제와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 부처의 경지는 그 성격상 동질감을 지닌다.

불교가 추구하는 초월적 사유와 문학이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 삶의 반영은 그 위상의 차이가 있을 뿐 성격의 차이가 없다고 보여진다.

우리나라에서 불교 소설의 등장은 조선시대 소설이 생겨나면서 함께 나타나는데, 대표적 작품으로는 김만중의 ‘구운몽’을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삶의 무상함과 극락왕생의 모습들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작자 미상의 불교 소설들이 많이 있다.

그 외에 불경(전생담)을 소설화한 ‘금우태자전’, 불교를 멸시하던 옹고집 영감이 독실한 불자로 변모하는 ‘옹고집전’, 부처님의 생애를 담고 있는 ‘석보상절’, 안락국 태자이야기를 소설화한 ‘안락국태자전’ 등이 있으며, 근대 들어와서는 이광수의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死)’와 박종화의 ‘다정불심’ 등 역사소설도 등장하였다. 이 밖에도 김동리의 ‘등신불’, ‘까치소리’ 등이 부처님의 세계를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설   화

설화란 일정한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이다. 이것은 사실 자체를 그대로 이야기 한 것이라기보다는 흥미와 교훈을 위해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설화는 구전에 적합하게 단순하면서도 잘짜인 구조를 지니며, 표현 역시 복잡하지 않다.

불교설화는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불교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쉽고 흥미있는 비유와 인연 설화를 통해서 붓다의 사상을 되도록 체험적으로 이해하고, 불교적인 삶과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윤리도덕과 말라빠진 지혜에 윤활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설화가 담겨 있는 불교경전은 철학적 사상과 논리를 문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종합 예술인 셈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경전에 담겨진 설화들을 불교문학의 하나로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수   필

불교 수필은 같은 문학 갈래 중에서도 독특한 성질을 지니는 문학이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여 그 형상과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도 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새로운 양상과 지향성을 명쾌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서정과 서사에 의한 정서적 감동이나 허구적 흥미를 주기도 하면서, 다른 문학양식과의 상호 견인작용을 적절하게 포용하여 수필의 영역은 광범위하게 확대되기도 한다.

수필은 그 뜻대로 ‘붓을 따라서, 붓가는대로 써놓은 글’로 그때 그때 보고 느낀 것들을 산문으로 표현한 글이다.

수필은 그저 담수와 같은 심정으로 바라본 인생이나 자연을 자유로운 형식에 담아내는데, 인생을 통찰하고 달관하여 서정의 감미로움이 드러나기도 하고 지성의 섬광이 번득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수필은 독자의 심경에 부딪치기도 하고 사색의 반려가 되기도 하여 입가에 미소를 띄우게 하고, 철리의 심오한 명상에 잠기게 하기도 한다. 무한한 제재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표현하여 인생의 향기와 삶의 성찰을 더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이나 사회, 역사, 자연 등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느낀 것과 생각한 것 모두를 자유자재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필은 무엇이라도 다 담을 수 있는 용기이지만, 그러한 제재는 작가의 투철한 통찰력과 달관에 의해서 선택되어야 하고,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를 거쳐 나오는 생생하고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


한국 문학에 끼친 불교 정신

문학은 시대와 역사, 사회적 환경의 산물로 한국의 역사와 더불어 공존해온 불교사상, 불교정신이 한국문학에 훈습되어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한국인의 정신 세계에 거부감없이 전향적으로 승화되어 녹아있어 한국인의 외양적 현실 생활과 내면적 정신세계에 오랫동안 숭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불교의 심오한 영향은 특히 문학의 경우 한결 두드러진다. 정제된 한국문학의 장을 여는 신라인의 노래는 바로 불교에 기반한 지혜와 신비의 표현이었고, 그 이래로 수많은 한국 문인들은 창조적 영감과 상상의 원천을 불교에서 구했다.

고대 시가는 물론 일찍이 신라 향가에 와서 불교 시가 문학의 꽃이 피웠으며, 월명사의 ‘제망매가’, 충담사의 ‘찬기파랑가’에서 보여준 고결한 불교정신의 문학적 승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애창되고 있습니다. 특히 고려때 편찬된 ‘삼국유사’는 시가와 설화 즉 시문학과 산문문학의 일대 집대성이다.’ ‘삼국유사’는 역사책이며 불교문학사이며 또한 손색 없는 문학 교과서이다.

한국 현대 문학에 와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박두진의 ‘나룻배와 행인’ ‘찬송’ ‘복종’ ‘알 수 없어요’, 서정주의 ‘귀촉도’ ‘동천’ ‘추천사’, 조지훈의 ‘승무’ ‘고풍의상’ ‘낙화’, 박목월의 ‘불국사’ ‘보살’ 등이 매혹적으로 불교정신을 시가로 승화시켰다.

설화에 뿌리를 둔 산문문학 역시 이광수의 ‘원효대사’ ‘조신의 꿈’, 박종화의 ‘이차돈의 사’, 김동인의 ‘꿈’, 김동리의 ‘등신불’, 김정한의 ‘수라도’, 한승원의 ‘포구의 달’ ‘아제아제바라아제’, 김성동의 ‘만다라’ 등이 중후한 불교 소설 문학을 창출해냈습니다. 이러한 성과들은 물론 전시대에 축적되었던 향가, 선시, 악장, 한시, 가사 등의 자양과 ‘왕랑반혼전’ ‘구운몽’ ‘심청전’ 등의 고전 불교문학의 영향을 계승하고 있다.

一枝庵 복원기

                        -김봉호 기록

전야

 1976년 8월 하순의 어느 날 오후 전남 해남 학동의 모처에 전화가 걸려왔다. 진주의 대아중고등학교장 박종한 선생이었다. 반가운 손님들을 모시고 올거라는 사연이었다. 박 선생과는 차의 일로 대흥사와 그 곳 응송 박영희 노장 댁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구면이었다.

 그 오후가 지나고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손들은 나타나지 않더니 밤 9시 경에야 세 대의 차가 들이 닥쳤다. 좁다란 내 서실에 들어선 손들은 박종한, 손상봉, 박동선, 박태영, 조창도, 서일성, 석도범 제씨들이었다.

 수인사가 끝나자 손들은 입을 모아 草衣選集(김봉호 편찬)을 칭찬했고 이어 차를 거듭 마시면서 차례와 차문화 보급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속출하였다.

손들은 진주에서 직행하여 몹시 피로해 보였는데 식전인 듯 하여 안에다 대고 저녁을 지으라는 내 호령을 극구 저지하면서 바로 광주로 떠난다며 전화로 호텔 예약을 하더니, 화제가 조금씩 구체화 되어가자 이번에는 광주행을 취소하고 해남에서 하루를 묵기로 하였다.

 그럭저럭 11시가 되었는데 새삼스레 저녁을 지을 수도 없고 읍의 식당들은 이미 문을 닫았을 터이어서 내가 천일관(해남읍내 한식당)에 전화를 걸었더니 거기 역시 종업원들이 귀가했다는 것이었으나 간청간청해서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겨 화제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12시가 지난 데다 그 날이 군단위의 무슨 행사가 있었다하여 여관마다 방이 없다는 것이다. 내 집에 방은 댓개 있으니까 그리로 가자거니 밤중에 그럴 수 없다거니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 경찰서의 형사 한분이 나타나서 방을 두개 구했으니 쓰라는 것이었다. 고맙기 이를 바 없었으나 그래도 방은 모자랐으므로 우리들은 타협 끝에 그 방 두개와 내 서실을 쓰기로 하여 궁색한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내 서실에서는 박종한, 손상봉, 박태영 세 분과 내가 밤을 지샜다.

 각설하고 그 일행과 합의를 본 사항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첫째는 차인문화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차인들이 한데 모여 모임체를 구성해야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인 초의선사의 일지암을 복원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손들과 나는 가까운 시일에 날짜를 잡아서 서울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한국차인회와 일지암 복원추진위원회 결성

 1976년 9월 모일, 서울 오류동의 박동선 회장 댁에서 일차 모임이 있었다. 그 때의 참석자는 대략 다음의 분들로 기억된다.

 박동선, 효당 최범술, 청사 안광석, 박태영, 김미희, 정승연, 박종한, 손상봉, 임경빈, 이영노, 황태섭, 조창도, 김종희 차재석, 장명식 제씨와 김봉호였다.

모임은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안건은 아무 이의없이 처리되었다. 그 날로 한국차인회와 일지암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된 것이다.(정식 발족은 그 후의 일이었지만)

본란은 일지암복원에 관한 일만 쓸 것이므로 한국차인회의 전후사정은 생략하겠다.

  일지암 복원추진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76년 10월 5일이었다.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봉호/ 부위원장 박종한, 김미희/ 이사 김종희, 임경빈, 이영노, 고범준, 정영복, 장명식, 이정애, 박태영, 황태섭, 임광현, 유종선, 도범, 정승연, 차재석/ 상무이사 조창도/ 사무국장 이광종/ 고문 최범술, 신형식, 박동선/ 지도위원 안광석, 정명수, 이을호, 허건, 김종해, 김운학, 이덕봉

 위원회에서는 우선 전국 차인들과 각계 요로에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발송하였다.

일지암 복원 취지문

  일지암이라 함은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소재 大興寺(大芚寺) 사찰 내에 있었던 한 암자입니다.

 지금은 주춧돌과 깨진 기와가 남아 있을 뿐 옛모습은 간데 없지만 문헌 또는 구전에 의하면 이 암자는 ㄱ자 네칸의 그 셋째 칸을 차실로 꾸민 조그만 가람을 중심으로 乳泉과 蓮池와 紫竹으로 둘러싸인 幽遂(유수)한 구조였다 합니다.

  이 일지암은 普濟尊者 草衣大宗師가 1826년(순조 26년)에 結庵하였습니다. 초의스님(속명 장의순)은 전남 무안 삼향에서 출생, 5세 때 나주 남평의 雲興寺에서 祝髮하고 19세 때 대흥사로 옮겨 大敎修學 후 잠시 화순 雙峰寺, 경주 佛國寺에 머문 적이 있고 일지암 결암 후에도 금강산 등 명산과 경향각처를 자주 주유하였으나 81세에 입적할 때까지 줄곧 여기에 머물렀습니다. 초의스님은 여기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즉 經과 禪에 통달했으며 시문, 서, 화, 삼절이요, 특히 사라져가는 차례를 바로 세운 차인이었습니다.

  한국의 陸子羽, 한국의 蘇廣, 혹은 한국의 茶仙이라 일컫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리고 차례의 진수를 밝힌 ‘茶神傳’과 ‘東茶頌’을 저술하였으며 멋과 맛을 깊고 넓게 터득한 선비와도 상통했던 초의스님의 일지암을 복원하는 일은 우리나라 차례를 바로 세우는 첩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의 전통 차를 되찾고 이를 널리 진작할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차례의 뿌리를 되살리는 일과도 같은 일지암 복원불사에 강호제현의 협조 있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76년 9월 20일

일지암 복원 추진위원회

현장연락장소: 전남 해남읍 학동 811 대둔학회내         전화: 해남 3400번

 

일지암은 초의가 지은 조그만 암자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들이 유달리 일지암 복원을 서두른 것은 그 암자가 건축미학상의 가치가 있다 해서가 아니고 종교의 측면에서 문제된다 해서도 아니며 그 곳이 유별나게 경치가 좋아서도 아닌, 오직 차의 중흥의 요람이었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면 초의는 어떤 인물인가, 우선 그의 연보를 간추려 본다.

-초의 연보 생략-

 위원회에서는 회의를 거듭한 끝에

1. 현장을 확인 할 것.

2. 원형을 추정하여 설계를 끝낼 것.                      을 결의 하였다.

  현장답사는 전후 10여 차례 실시하였는데, 더러는 해남차인회에서 더러는 서울, 부산, 대구의 차인들과 더러는 대흥사의 스님들과 동행했고 그 자리가 틀림없다 해서 가설계도 그려보고 자축회도 열고 하던 중 ‘그 자리는 일지암 터가 아니고 新月庵 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첫째, 대흥사의 사찰림은 무려 900ha나 되었고 그 안에는 옛 절터가 100여 곳이 있어서 분간하기 힘들다는 점.

 둘째, 대흥사의 스님들과 인근 주민들 중에 현장을 알고 있는 분들이 모두 작고 했다는 점 등이다.

  위원회에서는 문헌으로는 ‘南茶並序’ ‘夢霞篇並序’ ‘大芚寺誌’를 더욱 면밀히 살펴보는 한편, 대흥사 사정에 밝다는 高 스님과 전주지 응송 박영희 스님의 고증에 따르기로 하였다.

 암자터를 확정 지은 것은 응송스님을 현장으로 모시고 간 1977년 2월 하순이었다.

 대흥사의 대광명전으로부터 동남간으로 1700m 자리에 있었는데, 현장은 낙엽과 토사로 뒤덮여 형태를 분간할 수 없었고 아름드리 잡목이 우거져서 그 곳이 과연 일지암 터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나, 산에 오르기 전에 응송스님과 高스님이 말한 백일홍과 두 층으로 된 연못을 확인하고 나서야 확증을 얻은 것이다.

 응송스님, 고 스님, 박종한, 김제현, 김두만, 조자룡 제씨와 김봉호가 입회했었다.

  다음은 건축설계였다. 회의를 거듭한 끝에 조자룡 씨(에밀레 박물관장)로 결정하였다. 조 박사는 우선 한국의 전형적인 차실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 무던히 애를 썼다. 서울을 위시해서 전국 각처를 샅샅이 뒤졌다. 사진도 약 300매 찍었다. 때로는 조 박사 홀로, 때로는 필자와, 때로는 박종한 씨와 무던히도 쏘다녔던 것이다.

 조 박사를 중심으로 우리들은 대체적인 윤곽을 잡아나갔다. 현장의 배열도 구상이 되었다.

 알지암은 5.5평의 정사각형 초가(茅屋)로 하고, 법당 겸 주택은 장차 모임으로 활용할 수 있게 15.5평의 瓦葺(와집)으로 내정을 하고, 가설계를 만들어서 서울의 진관사에서 열린 총회에 회부하였다.

 총회에서는 별다른 이의없이 설계의 내용과 총공사비 추정액 1500만원을 통과시켰고, 공사비 염출은 전액을 회원의 희사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