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文學의 世界
_禪詩를 중심으로
目 次
1.머릿 말
2.禪文學의 背景
3.禪文學의 特性
4.禪과 詩의 通路
5.맺는 말
1.머릿 말
깨달음을 지향하는 禪의 세계는 자신의 세계를 철저히 不立文字로 표방한다. 왜냐하면 어떤 형식의 틀에 갇히면 이미 본래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활발발한 선의 세계는 어떤 언어나 문자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체의 형식적인 틀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지향하는 선의 세계와 언어의 미학을 추구하는 시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禪과 詩에 관해 근래 많이 운위되고 있음을 보면서 선시의 특성을 밝히지 않으면 않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선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지는 많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근래 禪詩에 관심이 많이 높아가고 있음은 불교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 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문단에서도 역량 있는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선적 입장의 시를 쓰거나 평론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서 禪文學의 바른 이해의 길이 열려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선의 세계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이다. 선의 세계는 단지 마음으로 마음을 깨닫는 증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단적으로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선문학의 경우도 일반문학보다 어려운 점은 선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잘 해야 하는 어려움에서 들어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문학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여기서의 특성은 보편성과의 대립적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래 선문학에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어서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별하기 위해 붙인 수식어이다. 선문학은 선의 이해를 바탕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에 있어서도 중국의 선종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중국의 선종의 성립에 대해서는 많은 시각으로 연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연구에서 강조된 것중의 하나는 선과 중국의 노장사상의 섭합에 대한 지적이다. 물론 이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불교의 원형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선문학은 결코 선이라는 말을 끌어다 쓴다고 하여 선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은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있으며 선문학의 경우도 특별한 성격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선을 흉내내는 걸로 선문학이라고 우겨도 결코 선문학이 될 수는 없다. 적어도 선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선문학의 기본적인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언어를 빼면 달리 의사소통의 통로가 막히게 된다. 그러기에 불가불 言語文字를 의지하여 뜻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적인 선문학에 대한 연구는 金雲學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遺著가 『佛敎文學의 理論』으로 나온 후 선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간헐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주로 한국문학의 입장에서 국문학의 새로운 입장을 열어가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고려새대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국문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문학적 유산을 모두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는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상황임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문학에 대한 연구가 한국문학의 영역을 확대하는 자리를 차지 하고 있음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불교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무언가 미진함을 느끼게 됨은 국문학적인 입장에서 연구하는데 따른 불교학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선문학에 대한 연구는 일본이나 중국등지에서도 얼마간의 성과는 나와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현재의 상황이다. 선문학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는 역시 선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선 선시를 중심으로 선문학의 세계를 살펴보고져 한다. 선문학은 문학적 기교보다 선의 심오한 내용이 더 우선해야 할 것이며 그 심오한 내용속에서 문학적 기교가 흐르는 물처럼 자연적으로 유출되어 나와야 할 것이라고 고 김운학스님은 『 불교문학의 이론』에서 말하고 있다.
2. 禪文學의 배경
선과 문학의 관계를 살펴보고져 함에 우선 그 배경부터 알아보자. 선이 본래 불타에서부터 연원하지만 하나의 종파로 크게 성황을 이룬 것은 중국에 와서이다. 인도에서부터 선법을 전한 스님은 菩提達磨로 그의 전기는 상당히 전설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달마의 뒤를 이이서 6대를 내려와 6조 慧能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적인 체질에 맞게 선종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무수히 많은 선의 語錄에 의하여 선문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선문학의 뿌리가 초기의 불경에서부터 연원하고 있으니 가타(Gatha)의 형식을 하고 있는 불교경전이 그 뿌리라 할 수 있다. 불경의 문학적 형식의 3대 장르로 비유 설화 영송을 꼽고 있으며 불경을 나누는 형식으로 9분교 혹은 12분교를 들고 있다. 가타는 孤起頌이라고도 하며 운문의 형식을 띤 단독의 싯귀를 말 한다. 최초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담마파다(Dhammapada)와 수타니파타(Suttanipada)의 일부 그리고 장로게 장로니게 우다나등의 초기 경전들의 모두가 이같은 가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불타의 사용한 언어가 무엇이었는지는 여러가지 이설이 많다. 지금 남방에 전승되는 팔리어 장경의 원형이 무엇이냐도 많은 문제를 담고 있지만 불타시대의 마가다국의 방언인 프라크릿트(Prakrit)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서로 많은 상위점이 발견되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팔리어의 팔리(pali)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線 또는 聖典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비교적 후대에 생겨진 말이라고 한다. 불타 재세시와 입멸후 얼마까지는 合誦으로 구전되어 오다가 경전이 언제쯤 이루어졌는가는 확연히 말 할 수는 없지만 대략 아쇼카왕 전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불타는 청중들이 기억하기 쉽게 운문의 형식을 갖춘 偈頌으로 설법을 하셨다.
3장 12분교라고 하면 經 律 論 3장과 契經, 應頌, 記別, 諷頌, 無問自說, 因緣, 비유, 本事, 本生, 方廣, 未曾有法, 論議의 12분류를 말한다. 종래에 9분교였던 것을 뒤에 12분교로 나눈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을 볼 때 불교의 경전이 대단히 문학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좀 더 자세히 나누어 살펴보자.
ㄱ.게경;불타의 말씀을 산문형태로 담고 있는 것을 말한다.
ㄴ.응송;중송 또는 기야(Geya,지야)에서 유래되었으며 산문으로 설한 뒤에 다시 그것을 반복하여 운문으로 읊은 것이다.
ㄷ.기별;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뒤에 뜻이 바뀌어 제자들에 대하여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하는 의미가 담겨 있게 되었다.
ㄹ.풍송;가타(Gatha)라고 하며 뒤에 게송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불타게서 시적인 형식을 갖춰 설하신 겻으로 단독의 형태를 띄운다. 초기의 경전들은 대부분 가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같은 최초기의 경전은 물론 금강경같은 초기 대승경전도 이와 같은 게송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ㅁ.무문자설;불타가 스스로 설한 것을 말한다.
ㅂ.인연;교법이 일어나는 연기와 인연을 밝힌 것이다.
ㅅ.비유;비유와 우화를 써서 말씀하신 것이다.
ㅇ.본사;본생이 아닌 과거 전생의 일을 말한다.
ㅈ.방광;도리를 방정히 하고 문의를 널리 갖추어 밝힌 것이다.
ㅊ.미증유법;불타께서 그 위신력으로 불가사의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ㅋ.논의;문답논의에 의하여 법문의 진상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서 선문학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운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응송과 풍송을 들수 있다.뒤에 중국에 와서 선종이 일어나면서 많은 어록이 만들어지고 게송이 생겨나는 뿌리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비유와 설화와 영송중에서 운문 문학과 선문학은 가장 인연이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불교문학의 초기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초기의 경전을 살펴보면 가장 초기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경전으로 수타니파타(Stta-nipatha), 담마파다(Dhammapada), 테라가타(Theragatha), 테리가타(Therigatha)등 경전이 모두 가타의 형식을 띄고 있음은 게송의 연원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법구경은 남방과 북방에 모두 전승되고 있는 경전으로 가장 초기의 경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423편의 게송으로 되어 있으며 그때 그때 불타께서 설하신 말씀을 담고 있는 것이다.팔리어의 경명으로 담마란 진리를 빠다란 길을 의미한다. 5세기 경 붓다고사(Buddhaghosa)가 주석을 붙였다.
수타니파타는 북방에는 전하지 않고 오직 일부가 義足品으로 한역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게송으로 되어 있어 詩品이라고도 한다. 모두 사품, 소품, 대품, 의품, 피안도품의 5장으로 되어 있으며 불타의 가장 초기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 특히 제 4장 의품과 5장 피안도품이 더욱 오래 전의 것으로 전해진다. 장로게 장로니게는 불타 당시부터의 제자인 많은 비구 비구니들의 게송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불타의 게송도 들어 있다.
선문학의 배경은 무엇보다도 수행의 바탕에 있는 것으로 수행은 戒, 定, 慧, 3學을 근본으로 닦는 것이다. 3학과 8정도를 고루 갖춰 수행함으로서 깨달음의 언어가 나올 수 있다. 定과 慧를 함께 갖춰야 함은 보조스님도 강조하여 말 하기를 "모든 과거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 정 혜 삼학을 벗어난 것이 없다 고 하고 있다.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바른 지견이 나오고 바른 지혜에 의하여 바른 언어가 나올 때 바른 선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선문학의 연원에 대하여 불타시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음은 이미 위에서 강조한 바와 같다. 불타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중에 특히 가타의 형식을 하고 있는 것이나 중송의 경우 운문의 시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운문적인 형식이 뒤에 선가에 내려와 게송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문학의 꽃은 禪宗에서 활짝 피었으니 중국에서 선종이 성립된 이후 독자적인 많은 문헌을 갖게 되면서부터라고 할수 있다. 특히 게송으로 이루어진 시를 선문학의 정수로 볼 수 있다. 게송은 독자적으로 중국에서 발현되었다고 볼 수 도 있으나 그 뿌리는 역시 불타의 경전에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선시의 뿌리를 중국의 근체시에 두고 있는 입장을 보이는 이도 있다.
중국의 선종의 형성과 아울러 당의 시가 성황을 이루고 그에 따라 선가에서는 무수히 많은 선문학이 쏟아져 나왔다. 시는 盛唐의 시대에 극성하였지만 선은 中唐 내지 晩唐에 접어들면서 크게 성함을 보이고 있다. 당대의 훌륭한 선승들이 보여준 많은 선의 게송을 보면 비할 수 없을만큼 탁월한 시적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근래에는 이러한 선시와 초현실주의를 비교하여 연구하는 글을 보이기도 한다. 흔히 게송의 가장 오래된 모습으로 傅大士와 보지공 화상의 작품을 꼽고 있다.그러나 이것들은 당의 어느 때에 양자에 가탁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僧璨의 『信心銘』도 승찬의 전기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진위를 알수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히 승찬의 친작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신심명이 승찬의 작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百丈廣錄』에 이르러서이고 『歷代法寶記』나 『寶林傳』에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宗鏡錄』에 우두법륭의 신심명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심명이라고 하는 것이며 신심명과 심명은 유사성이 있어 신심명은 심명의 별행본인 정치본이었다고 논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한다. 실제로 선의 게송문학이 왕성하게 일어난 것은 石頭 문하에서이다. 그리고 동시에 馬祖 문하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하여 南泉, 위山아래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선문학의 모습을 온전히 잘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傳燈錄과 祖堂集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선시를 偈頌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偈와 頌이 달리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偈는 가타에서 유래되었으며 송은 중국의 전통적인 시 형식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시경에는 6義가 있으니 興 賦 比 風 雅 頌으로 頌은 성왕의 성덕을 송양하는 시문체라 하며 종묘제를 위한 가사체의 시문이라고도 한다. 頌은 형식상으로는 한시의 율격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용면으로 보면 頌은 문자를 빌려 문자 밖의 소식을 읊어 교외별전 불립문자의 종지를 전표하고 있다. 그러기때문에 그 격조와 기운과 함축이 독특하다.
처음 게송이라는 말이 보이는 것은 王維의 六祖能禪師碑酩幷序에서이다. 여기에서 시를 게송으로 말하고 있다. 傳燈錄과 祖堂集에 수록된 게송의 작자들중에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선사로 馬祖문하에 長沙景岑, 龜山正原, 香嚴智閑을 들 수 있으며 石頭문하에 石頭希遷, 丹霞天然, 三平義忠, 夾山善會, 洞山良价, 樂普元安, 龍牙居遁, 曹山本寂, 同安常察, 雪峰義存, 雲門文偃, 南嶽惟勁, 翠巖令參, 玄沙師備, 鏡淸道부, 臨谿龍脫, 淸凉文益등을 꼽고 있다. 그 밖에 선시를 논함에 뺄 수 없는 인물로 寒山이 있다. 그는 생존년대가 묘연한 인물로 선문학의 초기를 장식한 사람으로 그의 시집으로 寒山詩集이 있다.
3.禪文學의 特性
禪과 詩는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가 분명히 다른 세계를 갖고 있으니 이러한 면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의 세계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에 그 생명이 있는 것이다.
선문학의 특성으로는 일반적인 언어와 달리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선이 지향하는 세계는 깨달음을 증득하여 살아 있는 언어로 살려내는 것이다. 종교적 수도의 길이란 엄숙한 것이어서 예술의 세계에서 노닐 여유를 허용하지 안는다.시와 종교의 관게는 벼랑에 꽃을 던지는 것과 같다. 합치하는 순간도 있지만 이내 양자는 갈려야 할 운명에 있다. 종교라는 말을 선이라고 바꿔놓고 보면 그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선과 시의 관계는 위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통하는 면도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수행의 길이 결코 시적인 감성의 세계와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어 합쳤다가는 이내 다시 갈라지는 것이다. 벼랑에 던져진 꽃은 다시는 건져 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란 종교에 있어 벼랑과 꽃과 같은 관계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영원히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이내 서로 갈라서야만 하는 운명이 곧 선과 시의 관계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선과 시와의 다름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입장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선과 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니 시는 감성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상을 추구하지만 선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함께 뭉쳐 나아가는 것이라서 선에 있어서는 그 모든 생각이 하나로 응집되어 오직 일념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이 일념의 현상은 모든 상념의 순일상태로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과 시는 이와 같이 감성의 세계와 총체적인 통각의 세계와의 차이만큼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상을 달리고 펼치고 하는 것이겠지만 선은 모든 상념을 한군데 꽉 묶어서 집중시킴으로서 그것이 본성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는 이것이 최상의 자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만일 의식적으로 시를 쓰기 위하여 선을 한다거나 선을 하기 위하여 시를 배운다면 그것은 안될 것이다. 선과 시가 그 출발점이 다르고 그 취향이 서로 다른 것임은 두 말 할 것 없다. 다만 그 출발이 감성이건 지성이건 시경의 극치에 나간 어느 지점에서 취향을 달리 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선에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선과 시는 출발점이 다르기때문에 서로의 분명한 입장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여 서로의 입장을 혼동하여 시를 위해 선을 복속시키거나 한다면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는 여러가지 유사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옛부터 선과 시에 관한 논의가 있어 왔다. 선이 지향하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에 들기 위하여 많은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선의 세계는 어떤 논리적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히 비논리의 세계에서 초논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가의 화두가 상식을 초월해 있고 선사의 삶이 초연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사의 언어가 초월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들어내는데 여러가지 방편을 쓰고 있으며 때로는 격렬한 언어나 행위로 나타내기도 한다. 선시에 있어서도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悟道詩, 법을 전하는 傳法偈, 임종에 다달아 읊는 臨終偈, 수도의 과정을 그리는 修道詩, 산중 암자에서의 생활을 읊은 艸庵歌, 도 닦는 기쁨을 읊은 樂道歌등 내용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나뉘어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시의 분류방식에 있어 선의 입장에서 示法詩, 悟道詩. 염頌詩, 禪機詩, 시의 입장에서 禪理詩, 禪事詩, 禪趣詩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오도의 세계를 나타내는데 있어 언어를 떠나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기에 언어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 禪詩의 언어적인 특성을 살펴보자.
ㄱ. 깨달음의 언어
어디까지나 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을 제1의제로 삼고 있으며 고도의 수행을 통하여 이루어가고 있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은 말 할 나위가 없지만 그러나 의사소통의 방법이 언어문자를 떠나서 달리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부득불 언어문자를 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언어는 다분히 역설적이기도 한 것은 어떤 언어로도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깨달음의 순간을 게송으로 읊은 것이 오도송이다. 붓다부터 계속 이어져 왔으니 붓다의 오도송이 담마파다의 게송 153,154로 되어 있다.
한량 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하여 태어났나니 이는 두카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히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이 게송은 최초의 오도송이 되는 것이다. 붓다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아난다 테라의 요청에 따라 다시 반복해 주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중도(Majjhimapatpada)의 세계이며 열반(Nibbana)의 세계인 것이다. 이 중도는 구체적으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로 설명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의 통찰력으로 읊은 오도송이야말로 더 없이 깨달음의 세계를 잘 들어내주는 시이다.
ㄴ.直觀의 언어
직관은 선의 언어의 특징을 잘 들어내주고 있다.直覺的 세계라고도 하면 이는 서양의 직관과는 좀 다른 것이다.이러한 직각의 세계를 잘 들어내고 있는 경우가 선사가 학자를 제접할 때 흔히 쓰는 棒과 할이다. 불교적 세계관은 緣起論에 입각해 있고 중도의 세계에 서 있다. 그래서 중도적 세계는 직관으로 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雲門의 一字觀은 직절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가장 문학적으로 잘 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경험적 세계와 분별을 뛰어넘어서 청정하고 맑은 심성은 누구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사상인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의 생명이 일치하기를 희망하였고 해탈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사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통찰하여 근원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ㄷ.삼매의 언어
수행을 하는 것은 삼매를 얻어서 깨달음에 이르고져 하는 것이다.이런 삼매(Sammadhi)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요목으로 수행에 있어 선정과 지혜를 함께 아우러 나아가는 것이다.분명히 선의 언어는 일반적인 시의 언어가 함께 할 수 없는 내면적인 깊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과 혜는 함께 닦아져야 한다. 삼매를 닦지 않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다.이러한 삼매를 통하여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으며 지혜를 이루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ㄹ.平常心의 언어
선가의 언어로 평상심의 언어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의 평상심은 일상적인 차원의 세계를 뛰어넘은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언어이다. 馬祖의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이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이 모두 이러한 경지를 들어내주고 있는 것이다.
吉洲의 靑原惟信禪師의 상당설법에
노승이 30년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그뒤 선지식을 만나 공부길에 들어서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쉬고 보니 여전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대중은 이 세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 누구든지 터득하면 노승과 같은 경지임을 허락하겠노라.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의 3단계는 첫째는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상식적인 단계이다. 둘째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상태이다. 이것은 과거의 고정된 관념으로는 현상의 세계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셋째는 다시 산은 여전히 산이요, 물은 여전히 물인 것이다. 이 경지는 바로 완전히 깨달은 후 일상의 차원으로 돌아온 세계이다.尋牛圖에서의 返本還源과 같은 것이다. 첫째단계와 셋째단계는 말은 같으나 경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선의 일상적이고 평상적인 세계는 바로 이런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상의 마음을 떠나 달리 어디에서 도나 진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ㅁ.活句와 死句
선가의 언어중에 그 특성을 가장 잘 들어내주는 것이 활구 사구일 것이다. 참선의 요제는 활구를 참하는데 있다고 분명히 말 하고 있다. 아무리 많은 말이라도 뜻이 살아 있지 않으면 죽은 사구요, 제비와 참새의 지저귐도 뜻이 살아 있으면 활구이다. 活이라는 말은 사는 곳에서 이치를 본다(活處觀理)를 가리킨다.선종의 선리를 깨닫는 방식은 초기의 불교와 달리 내심의 사색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았으며 중국전통의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한다(近取諸身)는 즉물적 체 방식에 의거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祖師關이라고도 하니 한다고 했다. 참선이란 말할 것도 없이 활구선을 말한 것이다.
활구선이라야 조사관을 뚫을 수 있고 마음길이 끊어져 확철대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활구참선은 본래의 마음이 청정하다거나 마음이 곧 부처이다고 하는 사상을 밑에 깔고 진행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직각에 의한 체험, 순간적 돈오, 현묘한 표현등으로부터 활구참선에 의한 깨달음에 이르러 선종은 독특하고 체계를 갖춘 하나의 사유방식을 구성하게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인도불교의 단순한 사색과 달리 내심과 외계사이에 하나의 통로를 열어놓았으므로, 외물에 대한 체험과 선리의 깨달음 모두에 있어서 그것은 훨씬 생동적이고 활발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비이성적이면서 도약적인 것으로 노장과도 가까운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老莊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주장을 볼 수 있다.
선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이러한 수행의 세계에 들기 위해 정과 혜를 아울러 닦을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수행의 근본이 3학을 떠나지 않고 있으며 3학을 바쳐주고 있는 것이 8정도이다. 3학과 8정도는 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서로의 관계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戒;正語 正業 正命
定;正精進 正念 正定
慧;正見 正思惟
수행의 근본은 정과 혜를 온전히 고루게 닦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定慧의 닦음은 북방불교의 看話禪 수행이나 남방불교의 위빠싸나(觀法) 수행이나 다 같이 중요하게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종의 일어남이 중국화로만 이해하고 특히 노장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지적되는데 대하여 원래의 불타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라는 관점은 미약하였는데 중국선종이 중국화되는 과정뿐 아니라 본래의 불타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계 정 혜 3학을 근본으로 하는 점에서 본래의 붓다의 정신에 충실한 것은 남방불교나 북방불교가 다 같이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통합성의 바탕에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논증은 다음을 기약한다.
진리의 법을 들어냄에 어떤 방편이나 언어적인 형식을 가자하지 않고 직절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대적인 세계도 용납치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을 들어냄에 어떤 형식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직관의 세계를 선문학의 한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또 선문학의 한 특징으로 格外적이 성격을 들수 있다.
격외라 함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格은 일정한 틀이나 격식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틀을 벗어나 있는 것을 격외라고 하며 혹은 劫外라고도 한다. 가령 어느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라고 묻는 말에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한 것이라던가 혹은 어느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물음에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대답이 모두 격외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모든 公案이 이러한 격외로 학자를 갈등에 빠뜨려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4.禪과 詩의 통로
시와 종교는 아주 공통되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영원의 미를 추구한는 것이라면 그 영원성으로 해서 종교와 일치하지 않을 수 없게 처음부터 방향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측에서도 이런 사정은 같다. 종교의 절대적 진리란 일상적인 언어나 논리로 표현되기를 거부하는 면이 있기에 그 소식을 비교적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시적 표현을 안 쓸 수 없는 까닭이다.
선과 시의 일치를 주장하는 많은 禪詩論者들이 있어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에 매력을 갖는 많은 시인들이 있다. 선과 시가 이처럼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의 상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만큼 유사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선종의 많은 전적이 대부분 시적 형식을 하고 있음을 볼 때 선과 시의 관계는 매우 긴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철학적인 주류가 강력히 흐르고 있다. 때문에 문학에 있어서도 산문보다 시적 분야에 더 빛을 보이고 있다. 韻文이 散文보다 철학적 함축성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송과 게송등의 시귀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내용으로도 이를 따를 수 없다. 그것은 최고의 경지로서 인간의 오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세게를 간결하고 직관적으로 담아내기에는 시적인 형식이 가장 알맞기에 게송이라는 운문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禪詩一致論을 말하고 있는 사람으로 宋代이후의 禪詩論者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禪을 體로 삼고 詩를 用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선시에 있어서 禪理나 禪機와 같이 특수한 교계시도 있지만 眞如妙體의 대자연에 禪趣적으로 함축함으써 순수시의 풍미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선가의 시문학의 일반성과 특수성이있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에서 본다면 고승들의 하나의 몸짓이나 기침소리라 해도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런것을 통해서나마 도의 세계에 접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기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할 어떤 계기가 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선승들이 펼치는 시의 세계는 그것이 비록 도 자체에 비겨서는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굉장한 내용의 것이다. 이것들의 완전한 이해는 진지한 수도를 통한 우리 자체의 인간으로서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온전한 선과 시의 만남은 우리가 선적으로나 시적으로 성장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唐宋대의 많은 선시 옹호론자들이 선시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선과 시의 일치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 宋대의 嚴羽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滄浪詩話라는 시론집에서 시와 선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선은 깨닫는데 그 妙가 있고 시 또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의 눈을 여는데 그 妙가 있다고 하면서 선과 시가 다 같이 묘함을 구하는데 한가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은 禪과 詩의 體用論을 들 수 있다. 선은 시의 체요 시는 선의 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래 체와 용에 관한 말은 僧肇의 『肇論』 般若無知論에서 비롯된 말로 동양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체란 본질적인 세계를 말하고 용이란 현상적인 세계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체와 용이 대립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들어내주면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性과 相의 관계도 비슷한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이 시의 체가 되고 시가 선의 용이 되어서 상호 상승적으로 작용한다면 대단히 바람직한 세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체용의 논리는 서구적인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훌륭한 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이 시로 나티내지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아마도 선의 일상언어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의 언어는 일상성을 통하여 불심을 들어내고 있다. 평상심을 들어내는 말로 가장 잘 알려진 말이 趙洲의 平常心是道이다. 평상심 그대로 부처이니 달리 구하려는 생각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평상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평상으로만 알면 크게 어긋나고 말 것이다. 조주의 평상의 말속에는 온갖 비상의 세계를 뛰어넘은 다음의 평상심인 것이다. 그에 대한 대화는 다음과 같다.
조주: 어떤 것이 도입니까?
남전: 평상심이 도이니라.
조주: 그 도에 이르는 방법이 필요합니까?
남전: 향하려고 하면 어긋난다.
조주: 마음을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 있습니까
남전: 향하려고 하면 어긋난다.
조주: 마음을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 있습니까
남전: 도는 안다거나 모른다거나 하는데 달려있지 않다.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고 모르는 것은 무기이다. 만약 진정한 도에 이르르면 허공과 같이 비어 일체 시비가 없다.
이에 선사는 깊은 뜻을 깨닫고 마음을 밝혔다. 28세때이다. 여기에서의 평상심은 마조로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인간은 과거적 존재도 아니요. 미래적 존재도 아니요, 바로 현재적 존재임을 단적으로 일상적 언어를 통하여 들어내 주고 있다. 우리의 불성 또한 그 어떤 형식적인 굴레나 테두리에 갖힌 존재가 아니라 활발발한 대자유의 존재임을 일상성은 들어내고 있다. 일상성이 그냥 일상성이 아니라 고도의 깨달음의 세계를 함축한 일상성이기에 매우 파격적인 日常性인 것이다. "
5.맺는 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문학의 特性은 일반언어와 다른 면을 갖고 있다. 선문학이 많은 양의 시가와 게송을 갖고 있으며 또 선과 시를 비교하면서 논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접근이고 근본적으로 볼 때 선과 시는 분명히 출발점이 다르고 걸어가는 과정이 다르고 목적지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사점을 들어내서 비교하고 논의하는 것은 그만큼 상통하는 면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섣불리 선을 흉내내서 禪詩를 운위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런 일이다.
이 점에서 송대의 看話禪의 제창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大慧宗고의 태도는 매우 귀감이 될만하다. 대혜는 당시 스승인 園悟克勤의 저술로 禪門의 제1서라고 일컬어지는 『碧巖錄』을 학자들의 공부에 눈을 멀게 한다고 염려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자기의 은사가 아무리 위대하고 은사의 저술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공부하는 분상에서 방해가 되고 장애를 일으키면 가차 없이 불 태워 버리는 정신이 선가의 철저한 否定의 정신이요. 이러한 부정의 정신이야말로 선의 세계에서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선의 세계가 표방하는 것은 不立文字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분상의 일이요 실제분상에서는 많은 언어와 문자를 선가만큼 갖고 있는 종파도 따로 없다. 그러기에 불립문자는 不離文字속에서 그 의미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문자를 제외하고 달리 우리의 의사소통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선과 시는 서로 다른 면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같은 면을 갖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선은 시의 체요 시는 선의 용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매우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은 어디까지나 선이요 시는 어디까지나 시인 것이다. 선이 결코 시일 수 없고 시가 결코 선일 수 없음은 너무나 自明한 사실이다. 아무리 똥덩어리를 가져다 황금이라고 우긴들 어찌 똥덩어리가 황금으로 변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정확한 이해를 통하여 제대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어떤 현상이던지 다름과 같음을 함께 갖고 있으므로 동시에 이러한 사실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러한 안목은 선의 깨달음의 결과 가능한 것이리라. 논문의 애초의 의도는 선문학중에서 선시의 불립문자적 입장에서 특성을 들어냄으로서 선문학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오류를 줄여볼 의도였으나 충분한 연구가 되지 못했다.
본 논문에서 아직 미비한 것은 禪家의 偈頌의 源典에 대한 치밀한 연구이다. 이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_禪詩를 중심으로
目 次
1.머릿 말
2.禪文學의 背景
3.禪文學의 特性
4.禪과 詩의 通路
5.맺는 말
1.머릿 말
깨달음을 지향하는 禪의 세계는 자신의 세계를 철저히 不立文字로 표방한다. 왜냐하면 어떤 형식의 틀에 갇히면 이미 본래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활발발한 선의 세계는 어떤 언어나 문자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체의 형식적인 틀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지향하는 선의 세계와 언어의 미학을 추구하는 시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禪과 詩에 관해 근래 많이 운위되고 있음을 보면서 선시의 특성을 밝히지 않으면 않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선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지는 많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근래 禪詩에 관심이 많이 높아가고 있음은 불교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 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문단에서도 역량 있는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선적 입장의 시를 쓰거나 평론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서 禪文學의 바른 이해의 길이 열려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선의 세계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이다. 선의 세계는 단지 마음으로 마음을 깨닫는 증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단적으로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선문학의 경우도 일반문학보다 어려운 점은 선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잘 해야 하는 어려움에서 들어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문학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여기서의 특성은 보편성과의 대립적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래 선문학에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어서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별하기 위해 붙인 수식어이다. 선문학은 선의 이해를 바탕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에 있어서도 중국의 선종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중국의 선종의 성립에 대해서는 많은 시각으로 연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연구에서 강조된 것중의 하나는 선과 중국의 노장사상의 섭합에 대한 지적이다. 물론 이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불교의 원형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선문학은 결코 선이라는 말을 끌어다 쓴다고 하여 선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은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있으며 선문학의 경우도 특별한 성격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선을 흉내내는 걸로 선문학이라고 우겨도 결코 선문학이 될 수는 없다. 적어도 선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선문학의 기본적인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언어를 빼면 달리 의사소통의 통로가 막히게 된다. 그러기에 불가불 言語文字를 의지하여 뜻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적인 선문학에 대한 연구는 金雲學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遺著가 『佛敎文學의 理論』으로 나온 후 선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간헐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주로 한국문학의 입장에서 국문학의 새로운 입장을 열어가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고려새대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국문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문학적 유산을 모두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는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상황임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문학에 대한 연구가 한국문학의 영역을 확대하는 자리를 차지 하고 있음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불교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무언가 미진함을 느끼게 됨은 국문학적인 입장에서 연구하는데 따른 불교학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선문학에 대한 연구는 일본이나 중국등지에서도 얼마간의 성과는 나와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현재의 상황이다. 선문학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는 역시 선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선 선시를 중심으로 선문학의 세계를 살펴보고져 한다. 선문학은 문학적 기교보다 선의 심오한 내용이 더 우선해야 할 것이며 그 심오한 내용속에서 문학적 기교가 흐르는 물처럼 자연적으로 유출되어 나와야 할 것이라고 고 김운학스님은 『 불교문학의 이론』에서 말하고 있다.
2. 禪文學의 배경
선과 문학의 관계를 살펴보고져 함에 우선 그 배경부터 알아보자. 선이 본래 불타에서부터 연원하지만 하나의 종파로 크게 성황을 이룬 것은 중국에 와서이다. 인도에서부터 선법을 전한 스님은 菩提達磨로 그의 전기는 상당히 전설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달마의 뒤를 이이서 6대를 내려와 6조 慧能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적인 체질에 맞게 선종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무수히 많은 선의 語錄에 의하여 선문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선문학의 뿌리가 초기의 불경에서부터 연원하고 있으니 가타(Gatha)의 형식을 하고 있는 불교경전이 그 뿌리라 할 수 있다. 불경의 문학적 형식의 3대 장르로 비유 설화 영송을 꼽고 있으며 불경을 나누는 형식으로 9분교 혹은 12분교를 들고 있다. 가타는 孤起頌이라고도 하며 운문의 형식을 띤 단독의 싯귀를 말 한다. 최초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담마파다(Dhammapada)와 수타니파타(Suttanipada)의 일부 그리고 장로게 장로니게 우다나등의 초기 경전들의 모두가 이같은 가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불타의 사용한 언어가 무엇이었는지는 여러가지 이설이 많다. 지금 남방에 전승되는 팔리어 장경의 원형이 무엇이냐도 많은 문제를 담고 있지만 불타시대의 마가다국의 방언인 프라크릿트(Prakrit)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서로 많은 상위점이 발견되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팔리어의 팔리(pali)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線 또는 聖典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비교적 후대에 생겨진 말이라고 한다. 불타 재세시와 입멸후 얼마까지는 合誦으로 구전되어 오다가 경전이 언제쯤 이루어졌는가는 확연히 말 할 수는 없지만 대략 아쇼카왕 전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불타는 청중들이 기억하기 쉽게 운문의 형식을 갖춘 偈頌으로 설법을 하셨다.
3장 12분교라고 하면 經 律 論 3장과 契經, 應頌, 記別, 諷頌, 無問自說, 因緣, 비유, 本事, 本生, 方廣, 未曾有法, 論議의 12분류를 말한다. 종래에 9분교였던 것을 뒤에 12분교로 나눈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을 볼 때 불교의 경전이 대단히 문학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좀 더 자세히 나누어 살펴보자.
ㄱ.게경;불타의 말씀을 산문형태로 담고 있는 것을 말한다.
ㄴ.응송;중송 또는 기야(Geya,지야)에서 유래되었으며 산문으로 설한 뒤에 다시 그것을 반복하여 운문으로 읊은 것이다.
ㄷ.기별;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뒤에 뜻이 바뀌어 제자들에 대하여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하는 의미가 담겨 있게 되었다.
ㄹ.풍송;가타(Gatha)라고 하며 뒤에 게송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불타게서 시적인 형식을 갖춰 설하신 겻으로 단독의 형태를 띄운다. 초기의 경전들은 대부분 가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같은 최초기의 경전은 물론 금강경같은 초기 대승경전도 이와 같은 게송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ㅁ.무문자설;불타가 스스로 설한 것을 말한다.
ㅂ.인연;교법이 일어나는 연기와 인연을 밝힌 것이다.
ㅅ.비유;비유와 우화를 써서 말씀하신 것이다.
ㅇ.본사;본생이 아닌 과거 전생의 일을 말한다.
ㅈ.방광;도리를 방정히 하고 문의를 널리 갖추어 밝힌 것이다.
ㅊ.미증유법;불타께서 그 위신력으로 불가사의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ㅋ.논의;문답논의에 의하여 법문의 진상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서 선문학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운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응송과 풍송을 들수 있다.뒤에 중국에 와서 선종이 일어나면서 많은 어록이 만들어지고 게송이 생겨나는 뿌리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비유와 설화와 영송중에서 운문 문학과 선문학은 가장 인연이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불교문학의 초기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초기의 경전을 살펴보면 가장 초기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경전으로 수타니파타(Stta-nipatha), 담마파다(Dhammapada), 테라가타(Theragatha), 테리가타(Therigatha)등 경전이 모두 가타의 형식을 띄고 있음은 게송의 연원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법구경은 남방과 북방에 모두 전승되고 있는 경전으로 가장 초기의 경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423편의 게송으로 되어 있으며 그때 그때 불타께서 설하신 말씀을 담고 있는 것이다.팔리어의 경명으로 담마란 진리를 빠다란 길을 의미한다. 5세기 경 붓다고사(Buddhaghosa)가 주석을 붙였다.
수타니파타는 북방에는 전하지 않고 오직 일부가 義足品으로 한역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게송으로 되어 있어 詩品이라고도 한다. 모두 사품, 소품, 대품, 의품, 피안도품의 5장으로 되어 있으며 불타의 가장 초기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 특히 제 4장 의품과 5장 피안도품이 더욱 오래 전의 것으로 전해진다. 장로게 장로니게는 불타 당시부터의 제자인 많은 비구 비구니들의 게송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불타의 게송도 들어 있다.
선문학의 배경은 무엇보다도 수행의 바탕에 있는 것으로 수행은 戒, 定, 慧, 3學을 근본으로 닦는 것이다. 3학과 8정도를 고루 갖춰 수행함으로서 깨달음의 언어가 나올 수 있다. 定과 慧를 함께 갖춰야 함은 보조스님도 강조하여 말 하기를 "모든 과거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 정 혜 삼학을 벗어난 것이 없다 고 하고 있다.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바른 지견이 나오고 바른 지혜에 의하여 바른 언어가 나올 때 바른 선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선문학의 연원에 대하여 불타시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음은 이미 위에서 강조한 바와 같다. 불타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중에 특히 가타의 형식을 하고 있는 것이나 중송의 경우 운문의 시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운문적인 형식이 뒤에 선가에 내려와 게송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문학의 꽃은 禪宗에서 활짝 피었으니 중국에서 선종이 성립된 이후 독자적인 많은 문헌을 갖게 되면서부터라고 할수 있다. 특히 게송으로 이루어진 시를 선문학의 정수로 볼 수 있다. 게송은 독자적으로 중국에서 발현되었다고 볼 수 도 있으나 그 뿌리는 역시 불타의 경전에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선시의 뿌리를 중국의 근체시에 두고 있는 입장을 보이는 이도 있다.
중국의 선종의 형성과 아울러 당의 시가 성황을 이루고 그에 따라 선가에서는 무수히 많은 선문학이 쏟아져 나왔다. 시는 盛唐의 시대에 극성하였지만 선은 中唐 내지 晩唐에 접어들면서 크게 성함을 보이고 있다. 당대의 훌륭한 선승들이 보여준 많은 선의 게송을 보면 비할 수 없을만큼 탁월한 시적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근래에는 이러한 선시와 초현실주의를 비교하여 연구하는 글을 보이기도 한다. 흔히 게송의 가장 오래된 모습으로 傅大士와 보지공 화상의 작품을 꼽고 있다.그러나 이것들은 당의 어느 때에 양자에 가탁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僧璨의 『信心銘』도 승찬의 전기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진위를 알수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히 승찬의 친작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신심명이 승찬의 작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百丈廣錄』에 이르러서이고 『歷代法寶記』나 『寶林傳』에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宗鏡錄』에 우두법륭의 신심명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심명이라고 하는 것이며 신심명과 심명은 유사성이 있어 신심명은 심명의 별행본인 정치본이었다고 논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한다. 실제로 선의 게송문학이 왕성하게 일어난 것은 石頭 문하에서이다. 그리고 동시에 馬祖 문하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하여 南泉, 위山아래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선문학의 모습을 온전히 잘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傳燈錄과 祖堂集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선시를 偈頌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偈와 頌이 달리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偈는 가타에서 유래되었으며 송은 중국의 전통적인 시 형식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시경에는 6義가 있으니 興 賦 比 風 雅 頌으로 頌은 성왕의 성덕을 송양하는 시문체라 하며 종묘제를 위한 가사체의 시문이라고도 한다. 頌은 형식상으로는 한시의 율격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용면으로 보면 頌은 문자를 빌려 문자 밖의 소식을 읊어 교외별전 불립문자의 종지를 전표하고 있다. 그러기때문에 그 격조와 기운과 함축이 독특하다.
처음 게송이라는 말이 보이는 것은 王維의 六祖能禪師碑酩幷序에서이다. 여기에서 시를 게송으로 말하고 있다. 傳燈錄과 祖堂集에 수록된 게송의 작자들중에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선사로 馬祖문하에 長沙景岑, 龜山正原, 香嚴智閑을 들 수 있으며 石頭문하에 石頭希遷, 丹霞天然, 三平義忠, 夾山善會, 洞山良价, 樂普元安, 龍牙居遁, 曹山本寂, 同安常察, 雪峰義存, 雲門文偃, 南嶽惟勁, 翠巖令參, 玄沙師備, 鏡淸道부, 臨谿龍脫, 淸凉文益등을 꼽고 있다. 그 밖에 선시를 논함에 뺄 수 없는 인물로 寒山이 있다. 그는 생존년대가 묘연한 인물로 선문학의 초기를 장식한 사람으로 그의 시집으로 寒山詩集이 있다.
3.禪文學의 特性
禪과 詩는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가 분명히 다른 세계를 갖고 있으니 이러한 면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의 세계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에 그 생명이 있는 것이다.
선문학의 특성으로는 일반적인 언어와 달리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선이 지향하는 세계는 깨달음을 증득하여 살아 있는 언어로 살려내는 것이다. 종교적 수도의 길이란 엄숙한 것이어서 예술의 세계에서 노닐 여유를 허용하지 안는다.시와 종교의 관게는 벼랑에 꽃을 던지는 것과 같다. 합치하는 순간도 있지만 이내 양자는 갈려야 할 운명에 있다. 종교라는 말을 선이라고 바꿔놓고 보면 그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선과 시의 관계는 위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통하는 면도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수행의 길이 결코 시적인 감성의 세계와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어 합쳤다가는 이내 다시 갈라지는 것이다. 벼랑에 던져진 꽃은 다시는 건져 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란 종교에 있어 벼랑과 꽃과 같은 관계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영원히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이내 서로 갈라서야만 하는 운명이 곧 선과 시의 관계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선과 시와의 다름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입장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선과 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니 시는 감성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상을 추구하지만 선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함께 뭉쳐 나아가는 것이라서 선에 있어서는 그 모든 생각이 하나로 응집되어 오직 일념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이 일념의 현상은 모든 상념의 순일상태로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과 시는 이와 같이 감성의 세계와 총체적인 통각의 세계와의 차이만큼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상을 달리고 펼치고 하는 것이겠지만 선은 모든 상념을 한군데 꽉 묶어서 집중시킴으로서 그것이 본성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는 이것이 최상의 자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만일 의식적으로 시를 쓰기 위하여 선을 한다거나 선을 하기 위하여 시를 배운다면 그것은 안될 것이다. 선과 시가 그 출발점이 다르고 그 취향이 서로 다른 것임은 두 말 할 것 없다. 다만 그 출발이 감성이건 지성이건 시경의 극치에 나간 어느 지점에서 취향을 달리 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선에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선과 시는 출발점이 다르기때문에 서로의 분명한 입장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여 서로의 입장을 혼동하여 시를 위해 선을 복속시키거나 한다면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는 여러가지 유사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옛부터 선과 시에 관한 논의가 있어 왔다. 선이 지향하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에 들기 위하여 많은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선의 세계는 어떤 논리적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히 비논리의 세계에서 초논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가의 화두가 상식을 초월해 있고 선사의 삶이 초연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사의 언어가 초월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들어내는데 여러가지 방편을 쓰고 있으며 때로는 격렬한 언어나 행위로 나타내기도 한다. 선시에 있어서도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悟道詩, 법을 전하는 傳法偈, 임종에 다달아 읊는 臨終偈, 수도의 과정을 그리는 修道詩, 산중 암자에서의 생활을 읊은 艸庵歌, 도 닦는 기쁨을 읊은 樂道歌등 내용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나뉘어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시의 분류방식에 있어 선의 입장에서 示法詩, 悟道詩. 염頌詩, 禪機詩, 시의 입장에서 禪理詩, 禪事詩, 禪趣詩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오도의 세계를 나타내는데 있어 언어를 떠나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기에 언어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 禪詩의 언어적인 특성을 살펴보자.
ㄱ. 깨달음의 언어
어디까지나 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을 제1의제로 삼고 있으며 고도의 수행을 통하여 이루어가고 있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은 말 할 나위가 없지만 그러나 의사소통의 방법이 언어문자를 떠나서 달리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부득불 언어문자를 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언어는 다분히 역설적이기도 한 것은 어떤 언어로도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깨달음의 순간을 게송으로 읊은 것이 오도송이다. 붓다부터 계속 이어져 왔으니 붓다의 오도송이 담마파다의 게송 153,154로 되어 있다.
한량 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하여 태어났나니 이는 두카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히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이 게송은 최초의 오도송이 되는 것이다. 붓다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아난다 테라의 요청에 따라 다시 반복해 주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중도(Majjhimapatpada)의 세계이며 열반(Nibbana)의 세계인 것이다. 이 중도는 구체적으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로 설명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의 통찰력으로 읊은 오도송이야말로 더 없이 깨달음의 세계를 잘 들어내주는 시이다.
ㄴ.直觀의 언어
직관은 선의 언어의 특징을 잘 들어내주고 있다.直覺的 세계라고도 하면 이는 서양의 직관과는 좀 다른 것이다.이러한 직각의 세계를 잘 들어내고 있는 경우가 선사가 학자를 제접할 때 흔히 쓰는 棒과 할이다. 불교적 세계관은 緣起論에 입각해 있고 중도의 세계에 서 있다. 그래서 중도적 세계는 직관으로 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雲門의 一字觀은 직절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가장 문학적으로 잘 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경험적 세계와 분별을 뛰어넘어서 청정하고 맑은 심성은 누구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사상인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의 생명이 일치하기를 희망하였고 해탈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사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통찰하여 근원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ㄷ.삼매의 언어
수행을 하는 것은 삼매를 얻어서 깨달음에 이르고져 하는 것이다.이런 삼매(Sammadhi)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요목으로 수행에 있어 선정과 지혜를 함께 아우러 나아가는 것이다.분명히 선의 언어는 일반적인 시의 언어가 함께 할 수 없는 내면적인 깊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과 혜는 함께 닦아져야 한다. 삼매를 닦지 않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다.이러한 삼매를 통하여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으며 지혜를 이루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ㄹ.平常心의 언어
선가의 언어로 평상심의 언어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의 평상심은 일상적인 차원의 세계를 뛰어넘은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언어이다. 馬祖의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이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이 모두 이러한 경지를 들어내주고 있는 것이다.
吉洲의 靑原惟信禪師의 상당설법에
노승이 30년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그뒤 선지식을 만나 공부길에 들어서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쉬고 보니 여전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대중은 이 세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 누구든지 터득하면 노승과 같은 경지임을 허락하겠노라.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의 3단계는 첫째는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상식적인 단계이다. 둘째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상태이다. 이것은 과거의 고정된 관념으로는 현상의 세계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셋째는 다시 산은 여전히 산이요, 물은 여전히 물인 것이다. 이 경지는 바로 완전히 깨달은 후 일상의 차원으로 돌아온 세계이다.尋牛圖에서의 返本還源과 같은 것이다. 첫째단계와 셋째단계는 말은 같으나 경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선의 일상적이고 평상적인 세계는 바로 이런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상의 마음을 떠나 달리 어디에서 도나 진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ㅁ.活句와 死句
선가의 언어중에 그 특성을 가장 잘 들어내주는 것이 활구 사구일 것이다. 참선의 요제는 활구를 참하는데 있다고 분명히 말 하고 있다. 아무리 많은 말이라도 뜻이 살아 있지 않으면 죽은 사구요, 제비와 참새의 지저귐도 뜻이 살아 있으면 활구이다. 活이라는 말은 사는 곳에서 이치를 본다(活處觀理)를 가리킨다.선종의 선리를 깨닫는 방식은 초기의 불교와 달리 내심의 사색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았으며 중국전통의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한다(近取諸身)는 즉물적 체 방식에 의거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祖師關이라고도 하니 한다고 했다. 참선이란 말할 것도 없이 활구선을 말한 것이다.
활구선이라야 조사관을 뚫을 수 있고 마음길이 끊어져 확철대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활구참선은 본래의 마음이 청정하다거나 마음이 곧 부처이다고 하는 사상을 밑에 깔고 진행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직각에 의한 체험, 순간적 돈오, 현묘한 표현등으로부터 활구참선에 의한 깨달음에 이르러 선종은 독특하고 체계를 갖춘 하나의 사유방식을 구성하게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인도불교의 단순한 사색과 달리 내심과 외계사이에 하나의 통로를 열어놓았으므로, 외물에 대한 체험과 선리의 깨달음 모두에 있어서 그것은 훨씬 생동적이고 활발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비이성적이면서 도약적인 것으로 노장과도 가까운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老莊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주장을 볼 수 있다.
선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이러한 수행의 세계에 들기 위해 정과 혜를 아울러 닦을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수행의 근본이 3학을 떠나지 않고 있으며 3학을 바쳐주고 있는 것이 8정도이다. 3학과 8정도는 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서로의 관계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戒;正語 正業 正命
定;正精進 正念 正定
慧;正見 正思惟
수행의 근본은 정과 혜를 온전히 고루게 닦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定慧의 닦음은 북방불교의 看話禪 수행이나 남방불교의 위빠싸나(觀法) 수행이나 다 같이 중요하게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종의 일어남이 중국화로만 이해하고 특히 노장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지적되는데 대하여 원래의 불타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라는 관점은 미약하였는데 중국선종이 중국화되는 과정뿐 아니라 본래의 불타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계 정 혜 3학을 근본으로 하는 점에서 본래의 붓다의 정신에 충실한 것은 남방불교나 북방불교가 다 같이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통합성의 바탕에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논증은 다음을 기약한다.
진리의 법을 들어냄에 어떤 방편이나 언어적인 형식을 가자하지 않고 직절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대적인 세계도 용납치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을 들어냄에 어떤 형식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직관의 세계를 선문학의 한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또 선문학의 한 특징으로 格外적이 성격을 들수 있다.
격외라 함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格은 일정한 틀이나 격식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틀을 벗어나 있는 것을 격외라고 하며 혹은 劫外라고도 한다. 가령 어느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라고 묻는 말에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한 것이라던가 혹은 어느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물음에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대답이 모두 격외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모든 公案이 이러한 격외로 학자를 갈등에 빠뜨려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4.禪과 詩의 통로
시와 종교는 아주 공통되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영원의 미를 추구한는 것이라면 그 영원성으로 해서 종교와 일치하지 않을 수 없게 처음부터 방향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측에서도 이런 사정은 같다. 종교의 절대적 진리란 일상적인 언어나 논리로 표현되기를 거부하는 면이 있기에 그 소식을 비교적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시적 표현을 안 쓸 수 없는 까닭이다.
선과 시의 일치를 주장하는 많은 禪詩論者들이 있어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에 매력을 갖는 많은 시인들이 있다. 선과 시가 이처럼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의 상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만큼 유사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선종의 많은 전적이 대부분 시적 형식을 하고 있음을 볼 때 선과 시의 관계는 매우 긴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철학적인 주류가 강력히 흐르고 있다. 때문에 문학에 있어서도 산문보다 시적 분야에 더 빛을 보이고 있다. 韻文이 散文보다 철학적 함축성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송과 게송등의 시귀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내용으로도 이를 따를 수 없다. 그것은 최고의 경지로서 인간의 오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세게를 간결하고 직관적으로 담아내기에는 시적인 형식이 가장 알맞기에 게송이라는 운문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禪詩一致論을 말하고 있는 사람으로 宋代이후의 禪詩論者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禪을 體로 삼고 詩를 用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선시에 있어서 禪理나 禪機와 같이 특수한 교계시도 있지만 眞如妙體의 대자연에 禪趣적으로 함축함으써 순수시의 풍미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선가의 시문학의 일반성과 특수성이있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에서 본다면 고승들의 하나의 몸짓이나 기침소리라 해도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런것을 통해서나마 도의 세계에 접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기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할 어떤 계기가 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선승들이 펼치는 시의 세계는 그것이 비록 도 자체에 비겨서는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굉장한 내용의 것이다. 이것들의 완전한 이해는 진지한 수도를 통한 우리 자체의 인간으로서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온전한 선과 시의 만남은 우리가 선적으로나 시적으로 성장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唐宋대의 많은 선시 옹호론자들이 선시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선과 시의 일치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 宋대의 嚴羽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滄浪詩話라는 시론집에서 시와 선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선은 깨닫는데 그 妙가 있고 시 또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의 눈을 여는데 그 妙가 있다고 하면서 선과 시가 다 같이 묘함을 구하는데 한가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은 禪과 詩의 體用論을 들 수 있다. 선은 시의 체요 시는 선의 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래 체와 용에 관한 말은 僧肇의 『肇論』 般若無知論에서 비롯된 말로 동양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체란 본질적인 세계를 말하고 용이란 현상적인 세계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체와 용이 대립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들어내주면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性과 相의 관계도 비슷한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이 시의 체가 되고 시가 선의 용이 되어서 상호 상승적으로 작용한다면 대단히 바람직한 세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체용의 논리는 서구적인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훌륭한 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이 시로 나티내지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아마도 선의 일상언어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의 언어는 일상성을 통하여 불심을 들어내고 있다. 평상심을 들어내는 말로 가장 잘 알려진 말이 趙洲의 平常心是道이다. 평상심 그대로 부처이니 달리 구하려는 생각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평상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평상으로만 알면 크게 어긋나고 말 것이다. 조주의 평상의 말속에는 온갖 비상의 세계를 뛰어넘은 다음의 평상심인 것이다. 그에 대한 대화는 다음과 같다.
조주: 어떤 것이 도입니까?
남전: 평상심이 도이니라.
조주: 그 도에 이르는 방법이 필요합니까?
남전: 향하려고 하면 어긋난다.
조주: 마음을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 있습니까
남전: 향하려고 하면 어긋난다.
조주: 마음을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 있습니까
남전: 도는 안다거나 모른다거나 하는데 달려있지 않다.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고 모르는 것은 무기이다. 만약 진정한 도에 이르르면 허공과 같이 비어 일체 시비가 없다.
이에 선사는 깊은 뜻을 깨닫고 마음을 밝혔다. 28세때이다. 여기에서의 평상심은 마조로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인간은 과거적 존재도 아니요. 미래적 존재도 아니요, 바로 현재적 존재임을 단적으로 일상적 언어를 통하여 들어내 주고 있다. 우리의 불성 또한 그 어떤 형식적인 굴레나 테두리에 갖힌 존재가 아니라 활발발한 대자유의 존재임을 일상성은 들어내고 있다. 일상성이 그냥 일상성이 아니라 고도의 깨달음의 세계를 함축한 일상성이기에 매우 파격적인 日常性인 것이다. "
5.맺는 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문학의 特性은 일반언어와 다른 면을 갖고 있다. 선문학이 많은 양의 시가와 게송을 갖고 있으며 또 선과 시를 비교하면서 논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접근이고 근본적으로 볼 때 선과 시는 분명히 출발점이 다르고 걸어가는 과정이 다르고 목적지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사점을 들어내서 비교하고 논의하는 것은 그만큼 상통하는 면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섣불리 선을 흉내내서 禪詩를 운위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런 일이다.
이 점에서 송대의 看話禪의 제창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大慧宗고의 태도는 매우 귀감이 될만하다. 대혜는 당시 스승인 園悟克勤의 저술로 禪門의 제1서라고 일컬어지는 『碧巖錄』을 학자들의 공부에 눈을 멀게 한다고 염려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자기의 은사가 아무리 위대하고 은사의 저술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공부하는 분상에서 방해가 되고 장애를 일으키면 가차 없이 불 태워 버리는 정신이 선가의 철저한 否定의 정신이요. 이러한 부정의 정신이야말로 선의 세계에서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선의 세계가 표방하는 것은 不立文字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분상의 일이요 실제분상에서는 많은 언어와 문자를 선가만큼 갖고 있는 종파도 따로 없다. 그러기에 불립문자는 不離文字속에서 그 의미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문자를 제외하고 달리 우리의 의사소통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선과 시는 서로 다른 면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같은 면을 갖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선은 시의 체요 시는 선의 용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매우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은 어디까지나 선이요 시는 어디까지나 시인 것이다. 선이 결코 시일 수 없고 시가 결코 선일 수 없음은 너무나 自明한 사실이다. 아무리 똥덩어리를 가져다 황금이라고 우긴들 어찌 똥덩어리가 황금으로 변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정확한 이해를 통하여 제대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어떤 현상이던지 다름과 같음을 함께 갖고 있으므로 동시에 이러한 사실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러한 안목은 선의 깨달음의 결과 가능한 것이리라. 논문의 애초의 의도는 선문학중에서 선시의 불립문자적 입장에서 특성을 들어냄으로서 선문학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오류를 줄여볼 의도였으나 충분한 연구가 되지 못했다.
본 논문에서 아직 미비한 것은 禪家의 偈頌의 源典에 대한 치밀한 연구이다. 이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출처 : 談禪山房
글쓴이 : 영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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