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래 금당 최규용/한국 차문화와 금당

초의학 집대성한 땅, 무안 신기마을

매공tea 2024. 3. 11. 20:20

한국차문화협회 협회지  2000년 1~2월

초의학 집대성한 땅, 무안 신기마을

최 석 환 - ()한국차문화협회 이사, 편집주간

한 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고승들은 땅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신라 때 원효가, 그리고 고려의 일연이 그러하고 최근세에 활약한 사명 대사도 그러하다. 초의도 예외가 아닐수 없다. 초의는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나 선····차 등 뛰어난 재주로, 탄압받던 시대에 불교를 일으켜 세운 대흥사 13대 종장으로 승속을 막론하고 존경을 높이 받았다.

지난 1997‘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초의 스님이 탄생한 생가를, 초의 스님이 편찬한 대둔사지를 국역하는 등 초의 선사와 관련한 유적 보존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향림사 조실 겸 해남 대둔사 조실을 맡고 있는 천운 큰스님과 함께 찾았다. 초의의 생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탄생지와 출가지에 대한 규명작업이다. 그동안 많은 차인들이 초의의 탄생지 규명 확인작업을 벌여 왔으나 걸음마 단계에 머물렀다.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탄생지에 대한 역사 규명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초의 선사의 출가지에 대한 기록은 무안군 삼향면 외엔 없다. 다만 신헌이 쓴 초의대종사탑비명에 다섯 살 때 마을 앞 개천가에서 놀다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누군가가 구조해 익사를 면했다는 기록과 초의문집신기라는 지명이 나올 뿐이다.

금당 최규용 선생1976년 두 차례에 걸친 답사 이후 펴낸 금당차화(錦堂茶話)(1978년 발행)에는 초의 스님의 출생지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흥성 장씨의 후손을 만나 왕산리 동쪽 산 아래 흥성 장씨 선영 묘지가 있다는 얘기 등을 간추린 결과라고 쓰고 있다. 초의 스님의 출생지에 대해 관심을 보인 또 다른 인물은 응송 박영희다. 응송은 1985레저스포츠취재팀과 함께 탄생지를 답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의 신기마을을 출생지로 비정했다. 금당으로부터 신기라는 마을을 찾아보라는 증언에 따라 응송은 임성리로 비정한 것 같다.

무안군에서는 금당 선생이 추정한 왕산리를 초의 스님의 출생지로 확정했다. 왕산리는 금당 선생이 찾은 초의 스님의 선영의 묘지가 있는 부채산에서 한골을 넘는 중등포 저수지 윗마을이다.

필자가 1997년무렵 들은 얘기에 의하면 무안군과 목포시가 초의 선사 생가지를 놓고 서로 자기네 군에서 유치하려고 쟁탈전을 벌였다고 한다. 무안군에서는 여러 문헌을 토대로 자기네 군의 인물이라며 군수가 적극 나서서 2천만원의 도비를 들여 성역화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필자는 우선 문헌에 나오는 신기마을을 찾았다. 마을 촌로들에게 천운 스님이 무안군 신기마을 출신인 초의 선사는 우리 차문화의 중흥조이며, 이 마을 출신의 고승이었다고 설명하자 촌로들은 새로 듣는 사실이라며 신기마을을 안내해주었다. 그러나 초의선사문집에 전하는 신기마을과 일치되지 않았다. 100년 전 초의 선사가 문집에 기록을 남긴 신기마을은 현재 삼향면사무소 윗골에 있는 왕산마을이었다. 삼향면사무소의 관계자들의 증언과 마을 촌로들의 안내를 받아 왕산마을을 찾아갔다. 중등포 저수지를 돌아서 윗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왕산마을의 촌로들에게 초의 스님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며칠 전에도 군청에서 나와 사진을 찍어 갔다며 이 마을에 초의 선사의 8대손이 살고 있다고 했다. 다름 아닌 장명환씨였는데 그는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문중의 족보를 보여주었다. 무안 흥성 장씨 세족을 펼쳐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장우순(의순을 잘못 기록)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나 출가 뒤 한국차문화의 중흥조이며 선문사변만어와 초의 문집 등을 남김.”

무안군사를 편찬한 김순상씨는 족보가 전하는 장우순은 의순(초의 선사의 속명), 족보를 편찬한 장봉수씨가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명환씨가 가리키는 초의 선사 생가지는 왕산마을에서 약 20분 정도 오르면 있는 널다란 분지였다. 그곳에 앞으로 초의 선사의 생가가 복원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고승들의 탄생지를 답사해 온 필자에게 다른 고승들이 태어난 땅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기가 전해져 왔다. 왕산마을을 바치고 있는 큰바위를 중심으로 큰힘을 받고 있는 거인풍의 땅이었다. 그러한 땅의 영향이었을까. 초의는 여기서 태어나 탄압의 시대에 불교를 이끈 선지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당시 이름을 떨친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사상의 격을 한층 드높였다.

장명환씨는 스님이 5살 때 장마철에 마을 앞 개천가에서 놀다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마을촌로들이 건져 목숨을 구했다는 장소로 안내했다. 장명환씨가 가리키는 똘(냇가)은 초의 선사 생가지의 아랫마을 논밭 사이에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는 개울이었는데 현재는 개울이 없어졌다고 한다. 개울의 물이 현재의 중등포 저수지로 흘러 비가 많이 오면 중등포 저수지가 범람하고 개울이 범람해 장마철엔 개울 근처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초의는 16살에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40년만인 60살에야 고향 땅을 밟았다. 초의문집을 보면 당시의 감회를 이렇게 토했다.

고향 떠나 어언 40

다시 찾으니 머리에 흰눈 쌓인 줄 몰랐으라.

신기(新基)에 잡초만 우거졌으니

나 살던 집이 어디인가.

선영(先榮)의 옛 무덤엔

이끼만 거칠어 한발한발 딛기가 민망하구나.

초의 선사가 탄생한 왕산리 마을은 현재 8대손인 장명환씨만 마을을 지키고 있고, 이씨, 박씨, 김씨, 조씨 등 다양한 성을 가진 이들이 약 50여 가구를 이루고 있었다. 한때는 초의 선사의 종손들이 많이 살았는데 괴질이 마을을 휩쓸고 간 뒤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한다.초의 문집에 등장하는 신기마을은 당시 새로 집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초의 선사가 40년만에 찾은 신기마을은 그때 이주한 산 마을인 것 같다. 그 마을은 현재 삼향면사무소 윗동네에 있다. 그러나 초의 선사의 성장 마을은 왕산리가 분명해 보였다. 최근까지도 초의 선사의 부친의 선영은 잘 보존되었다가 전 군수가 야산에 채석허가를 내주는 바람에 본래의 자리에서 이동, 새로운 장지로 옮겼다고 한다.

초의 이후 법맥의 단절로 그의 많은 유품들은 흩어졌다.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초의의 화맥은 초의 - 소치 - 남농으로 이어졌고, 남농화는 일세를 풍미했다. 남농은 초의의 생가지를 두 번씩이나 방문, 초의 생가 복원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의 생가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을 묻었다고 한다. 장명환씨는 처음에는 남농이 내뱉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니 초의의 화맥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새삼 그가 내뱉은 뜻이 가슴 속에 되새겨진다고 말했다.

살아서는 대흥사 13대 종사에 올랐던 초의는 죽어서는 보제 존자라는 시호를 받았고 이제 그가 떠난 백여 년만에 정부(무안군청)에 의해 초의 선사의 생가가 복원되는 등 초의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이자 차성(茶聖) 초의의 정신은 지금 다시 후손들에 의해 꽃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