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래 금당 최규용/중국 차문화와 금당

중국 항주 여행기

매공tea 2009. 7. 14. 00:33

 

중국 항주 여행기


김민희


  얼마 전 중국 항주에서 열렸던 국제 차문화 세미나 참석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미롭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중국을 처음 가보는 나에게는 준비의 미흡으로 고생도 많았지만 꿈의 여행길이었다. 한마디로 이 여행을 통해서 국적과 말은 안통해도 차도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고 생각한다.

  차를 통해 화합됨을 느꼈고 무언의 대화 속에 서로를 알 수 있는 것이 차인들의 공통된 느낌이었다.

  여행사의 안내 없이 홍콩에 도착, 2박 3일 지냈다. 일행으로는 금당(최규용)선생님과 박여사, 김여사 등 모두 5명이었다. 그러나 홍콩에 도착 해 보니 금당 선생님 등 2명의 상해행 비행기 표가 없었다.

  미리 예약하지 않고 그냥 온 것이 실수였다.

  하는 수 없이 필자를 포함해 여자 셋이서 상해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여행사를 통해 미리 상해행 비행기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다.

  상해공항에 내리니 인민군 복장의 사람들이 삼엄한 모습을 하고 있어 공산국가에 온 것이 실감났고 웬지 뒷목이 뻣뻣해왔다.

  복잡한 검색과 환전을 끝냈고 공항로비에 나오니 사전에 여행을 안내하기로 약속한 조선족 정진호씨가 한글로 우리를 마중하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이국만리에서 한글로 우리를 마중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또 다른 감회였다.

  예약된 상해의 레인보우호텔을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는 끝없는 대지가 펼쳐졌다. 펄벅이 지은 대지가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듯 했다.

  외국인에게는 10배로 받는다는 호텔 숙박료를 정진호씨 도움으로 중국인과 같은 숙박요금으로 투숙했다.

  항주행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낮에는 상해시내를 관광한 후 밤에 택시로 항주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려 항주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상해시내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와 시내 여기 저기를 구경했다. 그곳 가이드의 배려로 중국 서민들의 적나라한 생활상을 보게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빈민가 같은 연립주택이 많은 곳에 방하나 부엌 하나 화장실이 함께 있는 정말 하층 서민들의 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접대한 요리는 괜찮았지만 너무나 가난 한 것 같았다.

  밤늦게 상해애서 항주까지 택시로 3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했다.

  항주는 밤에 보아도 정말 아름다운 도시 같았다. 아름드리 가로수,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중국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했다.

  숲속에 띄엄띄엄 건물이 서있는 절강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이 꽤 깊어서였다.

  호텔방은 초가을이어서 썰렁했다. 높은 천정에다 바람이 불때마다 삐걱거리는 창문소리를 들으며 셋이서 한반에서 첫 밤을 보냈다. 

  다음날 항주에서 국제 차문화 세미나가 열렸으나 그때까지 도착해야 할 금당선생님이 오지 않았다.

  항주에서의 국제 차문화 세미나에는 일본, 대만, 스리랑카, 미국, 한국, 유럽국가 등에서 180여명이 참석했다. 차 관련 논문은 51개국에서 제출됐고 이중 14편의 논문이 채택되었다. 세미나가 시작된 첫날 저녁 주최 측 만찬장에는 석용운스님 일행과 부산여전 일행, 대구 최혜자여사 일행 등이 한자리에 모여 아리랑을 부르며 만찬장을 장식하기도 했다. 금당선생님이 안 오셔서 몹시 서운했다.

  세미나 둘째 날 금당선생님이 도착하셨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국제 차문화 연구 세미나에는 금당선생님이 사회를 보셨다.

  통역은 중국인 여기호씨가 맡았다. 통역을 맡은 여기호씨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된 한국을 알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금당선생님이 항주에 늦게 오시게 된 것은 상해에서 비행기 예약이 제 때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가 늦었지만 행사 참석에는 지장이 없었다.

  세미나 마지막 날에는 절강성에서 모든 차를 관리 보급하는 <차인지가(茶人之家)>를 방문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이곳을 통해 차를 수입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차수입이 자유화되지 않아 중국차가 대량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우르과이 라운드로 곧 중국차가 우리나라에도 대량으로 수입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지금처럼 비싼 국내산 차가 중국차와 경쟁력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차인지가>를 가는 도중의 서호강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주변의 <루외루(樓外樓)>음식점, <서령인사(西怜印社)>등 유명한 곳이 있고 부근 모두가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중국 10대 경치중의 하나라는 서호의 아름다움은 우리 일행들의 넋을 뺏기에 충분했다.

  서호의 아름다움은 봄의 꽃, 여름의 연꽃, 가을의 달, 겨울의 눈으로 꼽기도 했다. 석양 노을이 깔리는 시각에 배를 타고 서호에 나서니 멀찌감치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과히 환상적이었다.

  각가지 모습의 건축미, 아치형의 다리, 호수가 한쪽에 정박해 있는 배들하며 그 옛날 소동파의 시 읊는 소리가 저절로 들리는 듯 했다. 인구 1만여명의 항주는 용정차가 유명하지만 비단, 호필, 벼루, 붓 등도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곳이다.

  서령인사란 곳은 인장, 조각 등이 유명하고 예술탑이 있으며 서예가등이 봄, 가을로 학술 세미나를 여는 것이기도 하단다. 소주 계림이 아르답다고 하지만 항주만 보아도 중국이 거대하고 아름다움을 알 것 같았다.

  <차인지가> 이사장의 초대로 간 <루외루>에서의 요리는 정말 감회가 깊었다. 꽃게 요리와 서호강에서 잡았다는 생새우 요리는 그 맛이 일품이었고 자라 발가락 요리는 우리일행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일행을 만나보기 위해 수백리 길을 마다않고 각성 성주들이 <루외루>에 모였고 차이나 칼라의 상고머리를 한 인사들을 보았을 때는 새삼 중국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호 옆의 화교호텔로 옮긴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중국의 정취를 만끽했다. 새벽녘 서호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온 시가지를 뒤덮었고 출근시간대의 자전거 행렬은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다. 자전거를 타고가면서도 서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새삼 대국 사람들의 면모를 엿 보는듯 했다.  

  다음날 호주에서는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육우가 살았다는 호주 묘산이한 동네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동네 한가운데 붉은 글씨로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을 환영한다는 현수박이 걸려 있었다.

  외국인이 이곳을 방문하기는 우리 일행이 세 번째란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2백여명이 몰려나와 환대가 대단했다. 그러나 이들은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5, 60년대 생활상과 비숫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항주 서호부근의 아름다운 풍경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12공탄쯤 되는 약한 불에 구운 새우를 먹으며 길거리를 걷던 기억하며 손짓 발짓으로 음식을 청해 먹던 생각을 하니 여행의 즐거움이 이런 것이었던가 싶게 가슴 아련히 젖어 온다.

  영은사라는 절과 서령인사를 가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한문을 써가며 택시기사와 요금을 흥정하기도 했다.

  언덕과 호수가 한데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같던 서호! 이런 곳에서 시가 읊어지는가 싶기도 했다.

  차행사에 다녀 온 지가 조금 오래돼 당시 찍었던 사진과 일기장, 기억들을 더듬어 생각나는대로 적어 보았다.

 

 

이글은 육우다경연구회보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필자는 당시 육우다경연구회의 재무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