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치유를 강조
평생 난치병환자 위한
인술 실천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에게 오히려 점심까지 대접하며 마음을 다독이고, 그의 고단한 삶까지 보듬으려 애썼던 무위당
이원세 선생.
지난 2001년 8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던 날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점심식사 후 담배 한 모금을 피우는
여유를 보일 정도로 그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이였다.
한 평생 앞에 나서지 않고 난치병 환자들을 위해 정성을
다했던 그의 일생을 돌아본다.
◆ 無爲堂 그는 누구인가
경북 청도에서 가난한 농사꾼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무위당(1905~2001)은 17세 때까지 四書三經을 공부했다. 이후 20세까지 수업료를 낼 수 없었던 형편이라 이리저리 스승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무위당이 의탁한 집에 당대의 대학자였던 석곡 이규준 선생이 방문했다. 무위당은 심부름을 위해 드나들며 먼
발치에서나마 석곡의 학문 깊음을 알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틈을 보아 “어디로 가면 선생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하고
석곡에게 물었더니 석곡 역시 무위당의 천품을 알아보고는 “모월모일 어디로 오너라”했다 한다.
무위당은 기쁜 마음에 이내 당시 대구의
유력자였던 석재 서병오의 집으로 갔다. 석재는 석곡보다 7세 아래로 그의 문하에 들었으나 대구에서는 오히려 석곡보다 석재가 더
유명했다.
천석꾼에 군수를 지냈으며, 서화가이자 재주가 많은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석재도 석곡을 만나 병을
고치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는 것.
무위당은 석재의 집에 무일푼으로 몸을 의탁하게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해야하는 힘겨운 생활을 시작했다.
석곡이 한달에 두어번 정도 석재의 집에 찾아와 무위당을 부르면 그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
중에서 두어가지 질문을 골라 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이 당시 그의 학업의 전부였다.
그러나 무위당은 비상한 결심을 하며
오로지 배움에 대한 은근과 끈기로 그 한계를 극복하고 스승의 학맥을 이었다.
그러던 1923년 석곡은 세상을 떠나게되면서 석재에게
무위당을 부탁했다.
이즈음 무위당은 6년7개월 간의 문하생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온다. 청도로 온 무위당은 20대
후반의 나이로 한약방을 열게된다.
주위에서는 무위당의 나이와 경험이 적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이치적으로 병을 다스려 1년
만에 주변에 명의로 소문이 났다.
주위의 연로한 약종상들도 결국 그들 가족의 난치병까지 젊은 무위당에게 진료를 맡김으로써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명성 덕분이었는지 그는 비록 시골의 한의사였지만 3년 만에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도 잠시
주변에서 돈을 좀 번다고 소문이 나자 그의 한약방도 가만두지는 않았다. 일제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져갔고 그는 마침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을 한다.
그러던 와중에 해방이 되자 그는 산에서 내려와 고향에서 이룬 재산들을 모두 둔 채 대구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호에서 이름을 딴 ‘무위당한의원’을 연다.
40대였던 이때에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두고 와야만 했던 고향생각에 그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간경화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게 된다.
그러다 물질의 덧없음을 깨닫고 정신 수양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고, 건강도 회복한다.
대구에서 제2회 한의사시험을 치르고 정식 한의사가 된 무위당은 침을 맞으려는 환자가 너무 많아지자 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자연스레 없어졌다.
그래서 이후에는 침을 놓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또 행여 별다른 질병은 없는데 돈 많은
사람이 단순히 피로회복이나 몸보신을 위해 약을 지으러 올라치면 그 역시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밥 잘 먹는 것이 보약이니
돌아가시오”라며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이렇게 그는 늘 물질을 좇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치중했다.
그는 오로지
난치병으로 몸과 마음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한 진료에 온힘을 쏟으려 노력했다. 치료비에 연연해 하기 보다는 점심까지 먹여가면서 환자의 고통을
나누려했다.
마음을 열리도록 해야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그만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환자를 그저 환자로서의 존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한 동반자로서 그를 진심으로 다독이고 보듬으려 했다.
그래서 환자도 하루에 10여명도 채 안되게 받았다한다. 환자
한사람한사람에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진료하기 위해서였다.
환자를 적게 보는 대신 질병이 어디서부터 오게됐는지 환자와의 진솔한
대화로 원인을 찾아내고, 환자가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인생상담을 한 뒤에는 환자 개개인에 맞는 각기 다른 세밀한 처방을 써서 난치병을
완치시킬 수 있도록 했다.
무위당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다른 환자가 온다해서 똑같은 처방을 쓰지는 않았다. 사람이 각기 다
다른데 어떻게 그 사람들 모두에게 같은 약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증상이 같을 지는 몰라도 병의 원인이 다 다르므로 같은 약을
쓰더라도 병이 낫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병은 정신 즉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허리를 약간만 잘못 움직여도 디스크가 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제로 허리가 약해서 오는 디스크와는 달리 심리적인
불안초조증세가 원인이라고 보았다. 정신적인 불균형이 결국 온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이치다.
대구에서의 생활에 마음의 안정을
느끼고 익숙해져 갈 무렵 무위당의 막내아들이 위암으로 고생하다 사망하게 되자 아들도 못 고치는 사람이 어떻게 한의사를 하겠느냐며
고통스러워했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였던 1985년 여름에는 평생을 남달리 금슬이 좋아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부인이 그만
뜻하지않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깊은 슬픔과 실의에 빠진 무위당은 대구에서 운영하던 한의원 문을 닫고 큰 아들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가게된다. 1985년(80세)의 일이다.
“마음을 다스려야 병을 이긴다”
소문학회로 이어진 무위당
정신
1985년 7월. 불의의 사고로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무위당은 부인이 평소 잘 다니던 절이 있는 대구 팔공산자락에
유골을 뿌려주었다. 오래 전부터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고 싶었던 무위당은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다 그 해 9월 경남 합천 해인사로
수도생활을 떠난다.
홀로 있는 아버지가 염려스러웠던 마음에 큰아들 종섭 씨가 여러차례 드나들면서 부산에 있는 집으로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처음엔 이를 완강히 거부했으나 결국 그 해 12월이 되자 무위당은 제2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부산 남구 광안동 큰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대구에서의 임상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온 무위당은 마음공부를 할만한 적당한 곳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부산 남구 남천동
금련산 기슭에 있는 ‘보림선원’이란 곳을 알게 되어 마침 그곳에서 만난 백봉 김기추 선사와 뜻이 맞고, 마음이 통해 시간이 날 때면 보림선원을
찾아가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그러다 보림선원이 땅주인의 요청으로 철거되면서 1990년초 진주 근교로 자리를 옮겨 새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무위당은 평소에 틈틈이 써 두었던 서예 40여점을 모아 부산호텔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고, 그 수익금을 보림선원 건축비로 희사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 범어사에 있는 사자암에서 법륜스님과 함께 참선하던 무위당은 여름날
저녁 나무 밑에서 그곳을 찾은 학생들과 직장인들에게 한문과 동양철학, 유교철학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소문학회가 생겨난 것은
1986년. 당시 부산에서 경희대 출신의 친한 선후배 10여명이 공부를 하던 모임이 있었다. 대구에서의 무위당에 대한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차에 이들은 그를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했다.
그렇게 해서 현재 소문학회 학술위원으로 있는 요산 김태국 원장(부산 요산한의원),
소문학회 회장인 우소 황원덕 교수(부산 동의의료원) 등을 비롯한 한의사 30여명이 매주 세 차례 무위당을 방문해 하루 두시간씩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무위당은 한의학의 근본원리를 비롯해 소문대요, 의감중마, 유교사상과 불교사상 등 동양철학, 사서삼경 등 한문도
가르쳤다. 무엇보다 배우러 오는 이들이 환자를 대하는 한의사들이었기에 그는 ‘환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젊은 한의사들이 공부하러 꾸준히 찾아오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강의를 듣고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매번 잊지 않았다고 한다.
가정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으나 공간은 협소해져 1989년 12월엔 인근에
있는 좀더 큰집으로 옮겼다.
한창 제자들을 가르치던 시절인 이때에도 이미 84세를 넘긴 고령이었지만 그는 차츰 가르침에 대한 보람도
느끼고, 애착을 갖게 되었다.
큰아들 종섭 씨(69·해운업)는 “아버지는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가족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애정을 가지셨다”고 회고했다. 그래서인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수시키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것 같다고
했다.
제자들의 간절한 청으로 가까스로 생전에 두 권의 책을 남기긴 했지만 본시 자신과 관련한 무언가를 남기는 것도, 남 앞에
나서는 것도 꺼려했던 그였다.
“공자같은 훌륭하신 분도 책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 아는 게 무엇이 있다고 책을
내겠는가. 외람되다”며 처음엔 제자들의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제자들의 청이 계속되자 간신히 받아들인 무위당은 그의 스승이었던 석곡
이규준(1855~1923)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편집한 ‘신방신편’과 석곡이 동의보감에서 소문의 원리에 맞는 내용을 뽑아만든 ‘의감중마’에
고금의 처방을 편집해 넣은 ‘백병총괄 방약부편’등 두 권의 의서를 남겼다.
그의 제자들은 이밖에도 평소 무위당이 공부하고 참선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틈틈이 시로 옮긴 글을 모은 ‘無爲堂雜詠草稿’라는 한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무위당은 어디까지나 사람은 인생관,
인격으로 대하고 위안해서 병을 다스려야 한다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병리공부를 제대로 잘 해서 치료해야지 무슨 처방이 잘 듣더라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양심에 부딪치는 일이라고 했다.
무위당은 환자의 病理를 먼저 파악한 뒤에 淸上通中溫下에 입각해 作方을 했다고 한다.
석곡의 부양론과 내경에 나오는 오맥법을 되살려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또 병을 초래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보아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七情(喜怒憂思悲驚恐)’을 예로 들며 ‘마음을 잘 다스려야 병을 이긴다’고 강조했다. 의사자신의 마음이 맑고 고요해야 환자의
마음을 열고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의 가르침을 받던 김태국 원장이 무위당을 찾아와 두 번 절했다. 이유인즉슨 어느
날 환청으로 고생하던 여고생이 양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김원장의 한의원을 찾아왔다.
여고생의 마음상태를
살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던 김원장은 여고생과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그 자리에서 함께 울고 말았다. 그렇게 약을 지어주고, 차도를 지켜보며
치료하자 여고생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한다.
밖으로 나서지 않는 무위당이었지만 그에겐 수백명에 이르는 한의계 종사자들 외에도
부산대 한문학과 국문학과 교수들을 비롯해 부산시 공무원, 의사, 법관 등 각계각층에서 그의 소중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현재 소문학회 대구지부에서 의맥을 잇고 있는 외손자 송헌 이국형(47) 원장(대구 중화당한의원)은 “어릴 땐 말씀이
너무 없으셔서 무서운 외할아버지로만 생각했었는데 제가 자라서 한의사가 된다고하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더라”며 “요즘도 환자를 진료할 때
할아버지께 배웠던 것들을 많이 쓰고 있는데...이제는 물어보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 없네요”라며 아쉬워했다.
2001년 8월
18일 노환으로 기력이 쇠잔해진 무위당은 9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살아생전 돈을 좇고 물질에 얽매이면 욕심이 생겨
정신이 흐려진다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릴 것을 강조했던 무위당. 주윗 사람들에게 늘 ‘구름같이 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자신 바로 그런
삶을 살다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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