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래 금당 최규용/금당과 끽다래

논문-금당에 관한

매공tea 2008. 12. 12. 14:09

인본주의(人本主義) 차인(茶人)

- 금당(錦堂) 최규용(崔圭用)의 끽다래(喫茶來)연구


                                                                      김현호

                                                    차문화경영학과 20040127

Ⅰ. 서론

Ⅱ. 금당 최규용 생애

Ⅲ. 금당 최규용 사상

    1) 한국 차문화 일반

    2) 금당 최규용 차정신

       (1) 금당다화를 중심으로

       (2) 현대인과 차 - 차를 즐기는 길을 중심으로

       (3) 번역서 다소를 중심으로

       (4) 중국차문화기행을 중심으로

       (5) 풍류차(風流茶)

       (6) 생활차(生活茶)

       (7) 진보성(進步性)

Ⅳ. 금당 최규용 끽다래

    1) 끽다래 탄생

    2) 끽다래는 항다반(恒茶飯)이다.

    3) 끽다래는 이야기하기다. 

    4) 끽다래는 게으르지 않음이다.  

    5) 끽다래는 평등한 부부관계이다.   

Ⅴ. 결론













국문 요약


주제어 :  금당, 최규용, 끽다거, 끽다래, 다성(茶星), 정행검덕, 생활차 


    금당 최규용은 2002년 4월 5일 밤 10시경 백세 때 돌아가셨다. 그분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차(茶)로 인연을 맺게 하였다.

    18세 때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차와 인연을 맺었다. 중앙청에서 일을 하면서 예부터 차문화가 있음을 알았고 전라도 출장하면서 차문화가 아직 있음을 알았다. 

    1934년 중국에서 사업 하면서 명차 산지를 여행하며 차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46년 중국에서 귀국한 뒤 우리나라 차 전래에 대하여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실사구시를 신조로 삼으려고 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수공사를 하면서 절에 차문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금당다화] 등 차책을 출간 하던 중 일본을 통하여 중국 육우다경연구회와 연결되어 1989년 직접 중국 각지의 차유적을 탐방하고 기록을 모아 [중국차문화기행]이라는 책자를 발행한다.

    1990년 중국 ‘차인지가(茶人之家)’와 상의하여 ‘국제차문화회’를 하여 제1회를 중국 항주에서 제4회를 한국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1995년 5월 25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중국 다인 82명 일본 다인 100여명, 인도 스리랑카 미국 독일 등 1000여명이 ‘국제차문화교류회’를 진행했다. 그는 노구(老軀)를 이끌고 한국 차문화가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를 염원하며 직접 이끌어 주셨다.

  금당 최규용 차사상은 생활 차이고, 형식이 아닌 실사구시이며, 풍류로 마시는 차이며, 차 대중화 위한 생활차이며, 젊은이에게 다가가는 진보성을 보인다.

    1988년 여름 해인사에서 일타스님과 석정스님을 만나 차가 대중화 되고 있으니 그 흐름에 맞추어 대표적 언어를 제정해 보자고 의논하던 중 심사숙고한 끝에 [끽다래]라 정하기로 했다. 생할 속에 차문화가 정착되려면 시장바구니 속에 싼 차봉지가 있어야 되며, 살아가면서 좋을 것을 가지고 싶겠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자기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검 덕(儉德)이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했다. 특히 젊은이를 반겼다. 구순(九旬) 노인이 힘난 목소리로 어떤 사상 종교 철학도 다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하셨다. 남녀노소 종교 이념을 막라하고 찾아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금당 최규용 박식함이 아니면 과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백세에 가까워서도 다인지가에서 한국과 중국차문화교류를 진심으로 노력하였다.” 라고 중국인이 칭하여 다성(茶星)으로 부르게 되었다.

    




    Ⅰ. 서론


    금당 최규용은 향년 100세.1) 2002년 4월 5일 밤 10시경 한국 부산광역시 송도 바다가 보이는 자택 - 금당다우(錦堂茶寓)에서 의자에 앉아 차 한잔 하시던 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2)

    금당 최규용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차(茶)로 인연을 맺게 하고, 이 인연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셨다.

    차인(茶人)들을 두루 살펴보면, 차 마시는 사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차를 강조함으로 인본(人本)이 아니라 물질본위(物質本位)를 앞세우는 이가 많은 차문화계에, 상화(相和)를 강조한 금당 최규용이 계셨기에 한국차문화계가 근본을 잊지 않는다고 보며, 이 자리에서 금당 최규용의 발자취를 되새겨보면서 그 결정체인 “끽다래” 차 사상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알아보고, 뒤에 남은 후배 다인(茶人)들의 할 일이 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금당 최규용 생애

   

    금당 최규용는 4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903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시기이다. 

    금당 최규용은 첫 저서인 『금당다화(錦堂茶話) 자서(自序)』3)에서

“1920년 나의 나이 18세 때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중략- 안주인이 노리끼리한 물 한잔과 손바닥만한 크기의 얇고 파삭파삭한 과자 두세장을 -중략- 시금텁텁한 맛에 냄새가 고소하고 은근히 구미(口味)를 돋우어 주는 것이다. 아무리 마셔도 물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때 그 맛이 잊혀지지 않아 어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삼세지학(三歲之學)이 지어팔십(至於八十)>이라는 말 그대로 이때부터 차는 내 생활의 반려자가 돼 온 것이다.” 라고 일본에서  차생활 시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기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중앙청 토목국에 다니던 시기(1924년~1930년)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중앙청 토목국에 취직되자 첫날 출근하니 사환이 차한잔을 갖다 주었다고 한다.4) 금당 최규용은 그 뒤에 고려사(高麗史)를 보니 ‘공사’라 하여 아침 대신들 회의 때 반드시 차를 먹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조선 총독부 토목과 근무하던 중 1929년 5월에는 현재에도 남아 있는 부산 명물인 영도다리를 설계하였다.5)

   3기는 1930년~1940년대로 전   라남도에 출장을 갔더니 나주와   강진, 해남지방에 야생차가 있다   는 것을 수차례 보고 알게 되었   다고 한다.

  이때 먹던 차는 약탕에 탕약을   다려 먹듯이 먹는 것을 알게 되   었고 또한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야생차가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림 1>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다리


     1935년 전라남도 산림기술자인 일본인이 쓴 ‘조선의 차와 선’이라는 책을 보게 되어 드디어 차에 대한 역사와 우리나라에도 신라부터 이조에 이르기까지 차문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시중에 파는 찻잎을 구입하여 상시로 음다하게 되었다.6)    

    1934년 (주) 동아조(東亞朝)를 중국 상해에서 설립 경영하며 차로 더욱 진일보하게 된다. 

  “필자가 차생활에 더 깊게 파고들게 된 까닭이 또 있다. -중략- 중국의 명차 산지인 강소성 소주와 -중략- 등지를 8년 동안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나로서는 차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여건이었다.

    이때 나는 중국인 친구들 -중략-그들의 차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어 관찰하고 배웠다. 이러한 나의 중국체류시절의 일이 나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생활에서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든 꼬투리가 된 것이다.”7)라며, 차 인연이 중국에서 필연이 되었다.      1938년 중국 상해를 가게 되었는데 차 파는 상점 간판에 ‘차장 다상 차보 차전 차헌 수당’이라고 붙인 것을 보고 직접 차를 사서 음다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는 차 본맛인 색향미를 모르고 마셨다. 사업상 술을 마시고 차를 한잔해 보니 다음날 사업에 지장 없든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때가 금당 최규용이 4-50대이다.8)   

    “1946년 중국에서 귀국한 나는 우리나라 차 전래에 대하여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중략- 단순한 차생활 뿐만 아니라 나의 차연구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오로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신조로 삼으려는 생각에서였다.”9)

    이때부터 차연구자(茶硏究者)로서 인생이 시작되었다.  

    3기 입문(1950년~1960년)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수공사를 설계하고 있을 때 두지 위에 ‘다각(茶角)’이라는 글씨와 ‘다로경권’ ‘끽다거’라는 글을 보고 사원 선방과    강원에 차문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67세때 맹목   적으로 차를 음다하다가 비로서 차와 물 색향미를 어   슴푸레 자득하게 된다. 이때부터 차에 대한 문헌을    탐구하던 중 ‘조선의 선과 차’에서 ‘초의 다신전’을 읽   게 되는데 이때가 70살 전후이며, 해인사 전 주지이   며 제헌국회 의원이며 다솔사 주지인 최범술스님을    알게 되고 미당 서정주선생이 ‘한국문학’에 발표 한    ‘초의 다신전’에 관한 문헌을 다시 검토하게 된바      1970년대부터 한국차 뿌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결과물이 1978년 ‘금당다화’라는 차책으로 탄생   하게 된다. 


 <그림 2> 응송스님 작


  금당 최규용은 자기 차정신을 “필자 다도 원류(源流)는 사찰에서 전래되어 온 사원(寺院)식 다도임을 밝혀 둔다.”라 하여, 초의선사에서 현대 응송스님으로 내려   오는 다맥(茶脈)을 이어 옮을 밟혔다.10)

  그리고 “우중 섭점(盂中 攝點)이라고 함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차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며 마실 수 있는 음다법이다”11) 우중 섭점 다법은 유리잔 하나만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방법으로 육우선생이 말씀하신 정행검덕(精行儉德)한 차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 정행검덕은 금당 차정신의 골격이 된다.       

  4기인 1980년대 초 일본을 통하여 중국 호북성 천문시에 있는 육우다경연구회와 서신 왕래를 통하여 차소식을 전하고12), 1989년 직접 중국 각지의 차유적을 탐방하고 기록을 모아 ‘중국차문화기행’이라는 책자를 발행한다.

   「한 중 일 육우다경연구회 경과보고서, 한국 육우다경연구회발기문」(1989: 9)에서

 “차문화 시원탐구(始源探究)는 마땅히 육우 다경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육우 다경으로 회귀(回歸)해야 하는데, 이는 어느 학문이든 그 원류(源流)를 밝히지 않고서는 대중화(大衆化)가 불가능(不可能)하듯 차문화 연구 역시 육우 다경 연구 없이는 한갖 시류(時流)에 그칠 것임을 우려한 소치(所致)라 하겠다.”라며, 한국에서도 뿌리없이 가지들만 나불거리는 차문화에 근원 연구에 대한 계기와 선생의 차정신인 실사구시를 90의 노구에도 몸소 실천하시고 정행검덕의 본향(本鄕)에서 육우선생과 그리워하던 만남을 가졌다.

  한중일 육우다경연구인들과의 교류회를 마칠 무렵 “나는 그들과 헤어지면서 자연   스럽게 육우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고, 그들로 부터 아직 한국과 중국의   국교가 열리지 않아서 초청하기가 어렵   겠지만 ...”

 “1989년 8월 그토록 고대하던 초청장이   중국으로부터 날아온 것이다”13)

 천문시 부시장이며 육우다경연구회 부   회장인 감량화씨였고 ‘육우다경기념관    준공식’에 초청하며, 금당 최규용이 더


 <그림 3> 육우상에 참배하는 금당. 


욱 기쁘게 생각한 것은 87세로 연로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을 동행 시키게 같이 초청한 것에 대해 대륙적이지 않을 수 없다며 감동을 받으셨다. “(한국) 정부 당국과의 대화 또한 어려움이 많았다. 당국은 중국에서의 초청장이 있다 할지라도 공식적인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중략- 순수한 민간 차원 문화 교류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처음 있는 경우 -중략- 9월 30일에야 출국을 허락받게 되었다”14)

    1989년 10월 10일 김포공항을 출발 직항이 없기에 홍콩을 경유하여 육우 다성 고향으로 향했다. 

“중국행 비자발급시간을 알아보니 13일에야 가능하다고 하여 다소 낙담했다”

    12일 예상보다 하루 먼저 호북성 무안으로 향한다. 무안에서 육우다경연구회 비서장이신 구양훈선생의 안내로 천문으로 향한다. 행사 참여와 여러 곳을 두루 다니시며 여러 다인들과 교류하시는 등

“일생의 소원을 푼 것이니 더 이상 기쁜 일이 또 있을 것인가!    끽다래(喫茶來)”15)

    끽다래 - 다어(茶語)로 여행기를 마친다.

   1990년 중국 절강성 항주에 있는 ‘차인지가   (茶人之家)’ 간부들과 수차례 상의하여 차문화   를 범세계화 하고자 ‘국제차문화회’를 하여 제1   회를 중국 항주에서 제2회를 호남성 장사 근교   상덕시에서 제3회를 운남성 곤명에서 제4회를   한국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1995년 5월 25   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중국 다인 82명    일본 다인 100여명, 인도 스리랑카 미국 독일 <그림 4> 중국 방문                등 1000여명이 ‘국제차문화교류회’를 진행했다.

  금당 최규용은 백수(白壽) 노구(老軀)를 이끌고 한국 차문화가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를 염원하며 직접 이끌어 주셨다.

Ⅲ. 금당 최규용 사상

   

   1) 한국 차문화 일반

  근대 차인들이 지은 책들을 보면 <차인(茶人)>들이 중심이 아닌 <차(茶)> - 그 물질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느낀다. 이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基) 당시 일본 식민지 지배자들이 남겨준 유산이 아닐까?

  그 한사람으로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식민주의 국가의 지성인들 중에서도 침략을 당한 민족에게 따뜻한 관심과 동감을 보내는 ‘양심적 분자’인 듯하나 조선 미술관(朝鮮 美術觀)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미심적은 구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고 박노자는 이야기 한다.16) 또 “야나기는 조선의 미를 ‘비애미(悲哀美 슬픔의 아름다움)’로 규정하고 조선인들을 ‘한의 민족’으로 봤다. - 중략 - 그는 조선 미술을 ‘몰아(沒我)적인’, 즉 개인의 의장(意匠)이 아닌 전통 형식이 지배하는 것으로 개념화했다. 그의 서술에 담겨있는 ‘개인이 없는 집단 위주의 사회’, ‘활동성과 기쁨이 결여된 미(美)’의 이미지는, 동양을 ‘단체주의적이며 피동적인’ 것으로 그려 ‘개인주의적이며 활동적인 유럽'과 대조 시킨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양심적인 지식임에도, 유럽이 그 식민지자에게 덮어씌운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를 야나기가 거의 그대로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다 적용한 셈이다.”17)

    다른 어떤 것보다도 조선자기를 유행시켜 결과적으로 그 가격을 올려놓은 것은 야나기 그 자신의 정열 때문이었다.18) 가격 상승에 대해 야나기는 이런 변영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여기서 민중적 공예의 약점에 대해서도 설명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 동안 민중적 공예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점에 집중되고 있었다. 하나는, 작자가 직공이기 때문에 미술가처럼 교양을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들이 만든 작품에 높은 수준의 미를 바랄 수 없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것은 민중 생활의 실용에 제공되는 잡다한 기물이며, 애당초 미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것에 높은 가치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19) 이라면 자기가 가치를 올린 것이 정당함을 설토(說吐)할 것이다.

    그리고 양심적 분자의 모습은 2005년 한국에서 그의 전시회를 가질 때 언론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각성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야나기는 미술관 계획을 제안했을 때 민화에 관해 이렇게 피력했다. ‘예술은 언제나 국경을 초월하고 마음의 차별을 초월한다.’20) 한 일 우정의 해를 상징적으로 만드는 이 전시와 함께 아마도 야나기는 마침내 그의 꿈의 일부가 실현되는 것과 국경없는 이 민화들이 민족 간에 공통적으로 지닌 것들에 의해 더욱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보게 될 것 같다.”21)

    이러한 점을 이데카와 나오키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사상과 민예론 체계를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재검토한 결과, 그것이 인간성을 무시하고 있으며 현실사회에 일정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 ‘전체적으로 인간성에 입각해 이를 유지하고 신장하는 공예의 새로운 역할, 즉 인간성의 거점이 되는 공예를 모색하고 있다.”22) 며 인간성 회복을 강조했다.

    이러한 식민지 풍토는 친일자 육당 최남선이가 다신(茶神)에게 백성들의 흐린 정신을 밝고, 맑게 해 달라고 빌었고 날마다 술에 취한 몽롱한 머리로 다가오는 국난을 헤쳐 갈 줄 모르는 우리 겨레에게 차 마시기를 권장하는 노래를 남겼다.23)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근대 1세대 차인들이 지은 책들을 보면 차를 마시는 사람은 없고, 반드시 무릎을 꿇고 다분히 일본식인 것인 의식화된 차도24)를 강조하는 글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차 만드는 제다법(製茶法)을 보더라도 일본 증제차 만드는 법에다 우리식 덖음차 만드는 법을 엮어 만들고 있다. 우리차는 훌훌 불며 마신다는 초의스님의 제자인 응송 박영희스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물식힘사발-숙우를 일본에서 가져와 우리차를 왜색화(倭色化) 시켜 버렸다. 출간된 차에 관한 책을 보면 일본 책을 - 잘못된 글도 그대로 번역하여 자기가 쓴 양 내는 경우가 허다했고, 어느 차선생(茶先生)은 우리나라에는 차문화가 원래 없었고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망언도 서슴없이 했다. 이 ‘바담 풍’의 왜색다도(倭色茶道)는 원류인냥 무비판적으로 그들의 제자들에게 또 계속 전수되어, 다도 교본에 우리 조상이 차를 즐겨 마신 이유에 건강에 이롭기에, 사색공간을 넓혀 주기에, 예의롭게 해 주기에 등 형이상학적 말만 만발하고 있다.25)     

    이런 엉터리 같은 차문화계에 반대해 대학생(大學生)들을 중심으로 차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서울은 ‘경희대학교 한의대학 선다회’ ‘국민대학교 명운다회’ 광주는 ‘전남대학교 남도차문회’ 부산은 ‘부산대학교 의과대 다연회’ ‘동아대학교 다연회’ ‘지산대학(현 부산카톨릭대학교) 지산다우회’가 금당 최규용과 여연스님의 도움 아래 창립되어 각 지역 다회연합이 만들어졌고 전국대학다회연합(全國大學茶會聯合)이 그들의 도움 아래 조직되었다. 1980년대는 파쇼 전두환도당이 학생들을 탄압하는 때였다. 그런데 정통성이 약한 전두환정권은 3S정책과 여의도에서 ‘국풍’ 등 관제행사를 열어 전통문화를 지켜나간다고 인민들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었기에 다인(茶人)대학생들은 이때를 이용하여 전국모임을 조직할 수 있었다. 전국대학다회연합은 광주지역연합을 중심으로 농민차운동(農民茶運動)으로 채다(採茶)하여 납품만 하던 차농민(茶農民)들도 직접 차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게 법 개정을 시켰고,.26) 부산지역연합을 중심으로 민중차운동(民衆茶運動)으로 왜색다도에서 벗어나 ‘노동자에게도 차한잔을’ 이라는 구호로 활동을 했으며,27) 지산대학 지산다우회는 최초로 차학술발표회를 가졌다. 대학다회들은 각 학교 동아리연합회 산하 학술이념분과에 속하여 운동으로서의 성격의 차문화를 지향했다. 

    이 당시 차문화계는 한국전통을 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 물론 하는 사람도 모르고 - 형식에 억매인 일본전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 행다(行茶)도 형식에 너무 치중하고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아플 뿐이다. 


   2) 금당 최규용 차정신

    (1) 금당다화를 중심으로

    첫 저서인 『금당다화(錦堂茶話) 자서(自序)』28)에서 

“1920년 나의 나이 18세 때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중략- 안주인이 노리끼리한 물 한잔과 손바닥만한 크기의 얇고 파삭파삭한 과자 두세장을 -중략- 시금텁텁한 맛에 냄새가 고소하고 은근히 구미(口味)를 돋우어 주는 것이다.”라고 차와의 첫 인연이 생활차(生活茶)임을 이야기한다.

  이 인연으로 이름만 남아 있던 초의선사의 행적과 우리나라   최초 차상품인 ‘백운옥판차’를 찾아내는 등 1965년부터 구상   한 『금당다화(錦堂茶話)』를 출간한다.29) 『금당다화(錦堂茶話)』   의 출간은 많은 언론들이 관심을 가지게 했다. 75세의 노옹   이 동호인들이 기쁨을 더불어 하고자 출판하였는데, 동호인   만의 기쁨으로 머물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녹차를 마시기를   바랬다.30)

 『금당다화(錦堂茶話)』는 최근 “선고다인 총서”라는 목적으로   2004년도 재출간하게 되었다. 

 <그림 5> 금당다화 표지 


   한국차연구가로써 신문지상에 한국차 정립과 전파에 힘쓰게 되는데, 이는 금당 최규용이 형식이 아닌 풍부한 삶의 경험을 통한 실사구시로 나타난다.


    (2) 현대인과 차 - 차를 즐기는 길을 중심으로

    두 번재 저서인 『현대인과 차 - 차를 즐기는 길』31)(1981년)를 통해 금당 최규용   의 차정신이 <끽다래> 차사상으로 정립됨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그 동안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던 ‘차 마시   는 법’을 사진과 같이 설명하여 어느 초보 차인이라 할지라도   쉬게 차를 마실 수 있게 했다.

  실사구시를 엿볼 수 있는데 ‘세수수건만한 돗자리도 차탁으로   대용 할 수 있다.’32)며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착탁   용 돗자리가 금당 최규용의 발명품임을 알 수 있다.  

  <그림 6> 현대인과 차 표지


앞에 이야기한 ‘우중섭점’법이 언제 어디서나 마실 수 있는 음다법으로 중국 다회에서는 일반화되고 있다고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다.33) 몇 년 전 유명한 차인의 아들이 운영하는 하동 어느 제다공장을 방문했을 때 가마솥이 이상하기에 물어보니 재래솥이 불편해 자기가 직접 개발했다고 하기에 감탄을 마지 않았는데 몇 일 뒤 중국에서 수입한 것임을 알고는 “지 애비 이름에 먹칠한 놈”이라고 속으로 분을 내었다. 이 일화 뿐 만 아니라 현재 차계는 자기 것이 최초 제일 우선 인냥 날뛰고 있는 작태를 볼 때, 금당 최규용은 어디서 경험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며 밝힌 실사구시사상을 강조하셨다.

   바닥에서의 행다, 식탁에서의 행다, 응접대에서의 행다, 친구 접대, 가족 차모임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국차가 형식이 아닌 생활 속에 파고 들여야 함을 연구 발표하였다.       

    이 책을 작은 크기로 만든 것도 들고 다니며 모르는 부분은 보고 활용해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 같다.

    책 뒷부분에는 차회석기(茶會席記)와 한국다도강좌 순서를 적어 둠으로 초보 차인들이 모임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 한 본보기를 적어두는 등 세심함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섬세함은 유품 중 사진첩을 보면 사진 뒤에 하나 하나 어떤 사진이라는 설명을 적어 놓으므로 그 가치를 더욱 빛냈다. 이런 차회(茶會)기록과 사진들이 어찌 개인 것으로만 치중 할 수 있을까? “국제춘추-역사학의 문젯점”에서 고고학 실증을 위한 과학 발달은 확실성과 신빙성으로 민족문화를 더욱 심화시킨다. 개별 나라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실증하였다하여 자기 나라 문화가 더욱 진보한 것 인냥 하지 않는 겸허한 태도를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 개인 공명을 앞세움을 삼가주기를 우리 문화 역사를 정립하는데 수백년 걸리더라도 성급한 판단을 하지 말기를 바랬다.34) 이런 생각 아래 금당 최규용은 살아계셨을 때도 ‘금당다우’에는 남녀노소 종교불문 어느 누구라도 차를 나누었다. 분파(分派)를 하지 않고, 자기 것만 지키지 않고 그저 나누어 주었다. 이런 부작용인지 타계(他界) 후 “나는 금당 수제자다”하는 이들은 많은데 정녕 그의 뜻을 따르는 이가 몇 명이며 수제자사이비들은 금당 최규용 진면목을 알기나 하고 어용 짓을 하는 것일까? 하여튼 간에 개인 기록이나 중국과 교류 기록 등 차문화에 대한 모습들이 사진 글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에 현존 우리들이 차문화계를 정립 발전시키는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다.


    (3) 번역서 다소를 중심으로

    금당 최규용은 역서인 『다소(茶疏)』35) 후기에

“술어(述語) 중에 오래 끽다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곳도 있고, 오역(誤譯)도 다소 있을 줄 안다”

“앞으로 후진들이 연구하여 진일보 실행되어 엇갈려 있는 우리 차생활에 『초의다신전』과 아울러 우리나라 다풍이 정착되었으면 하는 소망의 일념이 있을 뿐이다.”

    실사구시와 정행검덕을 차생활 신조로 삼은 금당 최규용은 다소를 번역하면서 형식 강조한 것에서 차문화 본질인 “끽다”를 강조하였고, 왜색다도(倭色茶道)에서 벗어나 초의선사 다풍을 이어가는 우리나라 차문화가 세워 지기를 소원하였다.


    (4) 중국차문화기행을 중심으로

    『중국차문화기행』36) 머리글에서 42년만에 다시 중국을 찾게 된 가벼운 흥분이 단순 관광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이야기 한다. “나의 중국 여행 기간 중의 여정과 그동안 느낀 나의 감상을 작은 소품으로 엮어 90을 바라보는 필자의 삶의 작은 정리로서, 이 여행기를 섰다. 또한 앞으로 세태가 변하여 중국을 쉽게 돌아 볼 때가 되면 거대한 국토와 무궁무진한 역사의 유산을 가진 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茶人들로 하여금 손쉽게 여행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책으로 펴내게 된 것이다.”37) 사람을 중심으로 한 금당 최규용의 말이 현재 실재(實在)하게 되었음을 보면 앞서가는 자는 어떤 마음과 행동을 해야 함을 느낀다.


    (5) 풍류차(風流茶)

    금당 최규용은 한국차는 ‘풍류(風流)로 마시는 차’라며, 풍류란 신라 화랑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중국에서는 풍류라는 말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며 매년 이월이 되면 동래 범어사 대웅전 앞에 매화나무 꽃을 따서 차인들과 풍류차를 즐겼다.38) 본인에게도 ‘매공 작약 폈네, 차 한잔 하러오시게’ ‘매화가 일품이야, 차 한잔 하시게’ 하시며 늘 부르셨다. 매화를 좋아하셨는데 본인에게 주신 호도 <매공(梅貢)>이며 사람들에게 어느 꽃보다 일찍 펴 차향을 나누어 주라는 뜻이다. 풍류차를 즐기려면 당연히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금당 최규용 옆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차와 선”에는 “금당 옹의 다도 세계는 실천적이고 실증적인 다도의 세계이다. 차가 건강과 장수를 가져다 주는 기호음료인 동시에 예술과 철학과 종교의 경지로까지 우리 삶을 이끌어 준다는 것을 94세의 노익장을 통해 우리 가까이에서 보여 주고 있다.


[금당다우]에는 다도의 제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금당 옹처럼 온화하게 사람을 대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사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하는 것이 금당다도의 정수다.


금당다도를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오지만 특별한 설명이 없는 게 금당다도다. 금당 옹 손수 정성껏 끓여 낸 작설차 한 잔이 금당다도를 넌지시 알으켜 준다고 나 할까”라며 탐방 기사를 실었다.39)


    이 탐방 기사에 금당 최규용은 다도를 “다도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다실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지. 그것이 바로 자기 행동과 마음과 질서의 미학이야. 획일적이고 딱딱한 질서가 아니고 고담하고 향그러운 차를 접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아름다운 질서지. 몸과 마음이 불결하고 혼란하면 고담한 차의 아름다움과 선(善)과 선(仙)과 선(禪)이 깃들어 있는 다도의 세계를 느끼지 못해.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정행검덕(精行儉德)이라 말할 수 있지. 정성스런 행동과 검소한 성품이 갖춰져야 차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되고 차 맛을 알아야 차라는 음료가 건강과 예술과 도의 세계로까지 발전 할 수 있는거야.”40) 육우의 정행검덕과 미학으로의 풍류차문화를 말한다. 이 풍류차의 넉넉함은 해인사에서의 5년간의 수도자 생활을 통해 익혀졌을 것이다.     

 

    (6) 생활차(生活茶)

    금당 최규용은 ‘태평양 설록차 특별기고 차의 대중화를 위하여’에 “우리나라에도 80년초부터 전통차를 마시는 음다인구가 점점 늘어나 현재는 백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녹차 생산도 대량 생산체제로 들어서 차가 서서히 생활 속에 파고 들고 있는 실정이다. ...  문화라는 것은 오랜 시일을 두고 국민적인 풍습에 기인하거나 생활의식에 뿌리를 내려야만 하나의 문화라는 이름이 붙게되는 것이다. 우리의 차문화도 음다운동 정도로 정착 될 수 는 없고 전체 국민들속에 다도 풍습이 배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본다. ... 몇가지 느낌을 가졌다. 현재 하고 있는 다도 교육이 너무나 고차원적(?)으로 해애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과 차를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이 너무 많이 개입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교육기관이나 교육 내용도 단시일 내에 끝나고 다도교실을 열어 단단한 밑바탕 없이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있다.”41) 20년이 지나 지금도 금당 최규용의 염려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더욱 기승하니 한탄할 일이다.

    “다성이라 불리우는 육우의 다경에 관해서도 천년 동안 내려오면서 정확한 고증에 의해서 해석한 책이 없고, 일부 차에도 관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남겨진 시와 의식기록은 있으나 일반 대중에게 읽혀질 수 있는 다도에 관한 책은 전무하다 해고 과언이 아니다. 『동다송』은 초의스님이 쓴 최초의 다서로서 자랑하고 있으나 차의 역사를 알기에는 역시 아쉬움이 많은 전문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차에 관한 문헌을 질문 할 때 『동다송』 외에 이렇다 할 만 한 문헌이 없는 것이 필자를 안타깝게 만든다.”42) 이런 마음에서 『현대인과 차』 등 차 실생활서(茶實生活書)를 만들게 했을 것이다.


    (7) 진보성(進步性)

    금당 최규용은 『태평양 설록차에 특별기고한 ‘차의 대중화를 위하여’43) 에서 “차값이 너무 비싸고 다구값도 비싸다고 하는 말을 필자가 종종 듣는다.”  “곡우 전에 따서 제조한 차는 100g에 3만원 정도 하더라도 중국이나 일본의 고급차에 비하면 그렇게 비싸지 않지만 일반 대중이 널리 먹을 수 있는 차를 5~6월 혹은 그 이후에 따서 제조하여 100g당 2천원 정도로 하면 차 보급이 대중화 되는데에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일상 생활에 쓰이는 차는 100g당 천원 정도로 널리 보급되어져야 하며 이러하 차는 커피와 다른 음료수보다도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이 그 집의 가풍을 높이고 건강을 증진시키는데도 한 몫을 할 것이다.” 며 생활 속으로 차가 어떻게 들어가야 함을 제시하셨다. 차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곡우전후에만 따서 만들어야 한다고 모두가 알고 있을 때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늦여름차 가을차 등을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 가격도 1/10도 안되는 정도로 제시함으로 실사구시의 진보성을 표현하셨다.

    70년대 후반까지만도 찻값이나 다기값은 참 쌌었다. 3천원 정도면 상품의 차를 200그람 정도 살 수 있었고, 다기값이라 해야 1만원 안팎이었다. 그랬던 것을 승려들이 “00스님 수제차” “**사 차”하면서 일반보다 두 배 세 배의 값을 붙였던 것이다. 일부 승려는 부도덕하게도 기존 제다공장의 제품에 상표만 자기 이름을 얹어 <특별히 만든 수제품>인양 속여서 팔기도 했다.44) 이 피해는 당연히 소비자에게 돌아왔다.

    대학생들이 찾아뵈면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겠냐” 며 편지봉투 등에 차를 나누어 주시며 “비싼 차 마시지 말고 엽차 마셔도 되니 마시고 졸업 후 차를 사서 마셔라” 하신 기억이 20년이 지났지만 아련하다. 차는 물기에 약하니 꽁꽁 밀봉해 보관했는데 학생들에게 편지봉투에 담아주시는 그런 과감함은 실사구시의 차정신이 아니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매년 초에는 중국대사관이나 일본대사관에서 신년 인사를 왔는데 옆에서 차 접대를 돕던 어느 분이 금당선생님 댁에 제대로 된 다기 한 벌이 없어 외국사람들 보기에 민망했다고 하더라고 말을 전했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드는 순간 형식에 억매이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시는 금당 최규용 본면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전 허백련화백께서 평소에 쓰시던 낡은 다구를 찍은 사진을 보기 좋게 각색하여 작은 소란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분들이 애장한 다구들이 허름하게 본다는 뜻은 형식에 벗어나지 못해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형식화 되어가는 왜색다도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리다도를 찾으려는 것이 금당 최규용의 진보성이다.

  또 한 사례로 전라남도 광주에서 <영호남 교류   를 위한 차인들의 만남>이 있었는데 망월동묘지   참배를 가서 차를 올리는데 거기서 금당 최규용   선생은 당신은 일제시대에 살았기에 차를 올리지   못한다고 하시며 큰절을 하셨다고 한다.45)

 

<그림 7 망월동묘지에서>


    다인 중에 효당 최범술, 미당 서정주 등은 일본이 그리 일찍 망할 줄 몰랐다   며 친일행적을 어쩔 수 없이 한 것으로 정당화하려 한다.46) 과거 자기반성 없이 다도만 하다고 해서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성 없는 우리나라 근대사가 지금 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다. 금당 최규용 같은 반성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을 보고 중국 다인들은 다성(茶星)이라고 말하였다. ‘성’자를 ‘聖’으로 쓰지 않고 ‘星’으로 부르므로 한중일 3국 다인들이 지향할 북극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Ⅳ. 금당 최규용 끽다래


   1) 끽다래 탄생

    <끽다래> 다구(茶句) 탄생에 대해 금당 최규용은 

    “필자는 올해(1988년) 여름 해인사에서 일타스님을 만나 우리나라에서도 차가 점점 대중화 되고 있으니 그 흐름에 맞추어 대표적 언어를 제정해 보자고 의논하던 중에 마침 부산 동래에 있는 석정스님을 만나 필자와 세명이 이틀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끽다거>가 있으니 <끽다래>라 정하기로 했다. 이 말은 집에 놀러 오라고 말하지 않고 <끽다래>라 말하면 말의 주격이 성립되고 또 차 보급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같아 이 말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리 셋이 그렇게 명명해 보았다.”47)라며 생할 속에 차문화가 정착되려면 시장바구니 속에 싼 차봉지가 있어야 되며, 살아가면서 좋을 것을 가지고 싶겠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자기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검 덕(儉 德)이라고 했다.      

    

   2) 끽다래는 항다반(恒茶飯)이다.

    항다반이란 예사로 항상 있어 이상하거나 신통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불가에서 승려들이 항상 차를 밥 먹듯 계속 마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라 한다.48) 

    금당 최규용 사상을 보았듯이 사람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차를 마시는 것은 차가 가지고 있는 약성성분 등이 좋아서 마시는 것도 물론 있지만 차를 마셔 마음을 다스리고 다성 육우선생이 말한 정행검덕지인 - 항다반인(恒茶飯人)으로 거듭나자는 것이다. 항다반이란 말은 중국에서 널리 쓰여져 왔는데 우리나라에 차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기는 신라때이므로 우리도 그때부터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항다반-밥 먹듯이 차를 마신다’로 이제 이 말의 제 뜻을 풀어 보았다. 그러나 이 말이 지금에 와서 왜 변화되어서 쓰여지는지 의심스럽다. 그런 의문의 하나로는 오늘날 누구나 모두 밥 먹듯이 차를 마시지 않으니까 항다반이 제 본디 뜻을 감추고 ‘별 일이 없는’ 양 잠적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항다반이 죽은 말이 되어 푸대접 받는 기구한 운명을 본디 모습을 찾아 준 사람이 [항다반인 끽다래恒茶飯人 喫茶來]라 쓰고 [다성 금당 최규용 茶星 錦堂 崔圭用]이라 쓰면, 드디어 우리나라에 밥 먹듯 차를 마시는 시대를 다시 연 노다인(老茶人)이다.    

              

   3) 끽다래는 이야기하기다. 

    금당 최규용은 누구나 좋아하고 특히 젊은이를 반겼다. 대학생일 때 우리들이 찾아뵈면 하나를 더 못주어 아쉬워하셨다. 구순(九旬) 노인이 힘난 목소리로 어떤 사상 종교 철학도 다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하셨다. 젊은이에게 이미 7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 대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기를 부탁할 정도로 국제 정세 흐름에도 앞서 있었다. 지금에 와서 우리가 중국이 이러하니 저러하니 하고 있으니 2-30년 앞선 선지식(先智識)이 새삼스럽다.

    남녀노소 종교 이념을 막라하고 찾아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금당 최규용의 박식함이 아니면 과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금당다우]에 찾아뵈면 항상 뭔가를 읽고 계셨다. 노년에는 노안(老眼)으로 돋보기로 보고 계시다. ‘늙어 눈이 안보이지만 돋보기로는 천천히 볼 수 있다’며 끓임 없는 읽기를 하셨다. 이 읽기는 본인에게도 전염되어 일년에 백권 가량의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등 금당 최규용께 뒤지지 않는 다인이 되고자 한다.       


   4) 끽다래는 게으르지 않음이다.  

    중국 대륙에 외국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사람이 금당 최규용이다. 그 비문 전문을 번역하여 본다.

         최규용 호 금당 1903년 1월생

         한국육우다경연구회 창시인 할아버지는 차를 즐긴다. 정행검덕 중국 상해에서 다년간 거주 하면서 중국 전통 문화 중 육우다경연구회에서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고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백세에 가까워서도 다인지가에서 한국과 중국차문화교류를 진심으로 노력하였다. 고로 세상 사람들은 당대 다성(當代 茶星)으로 부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공덕을 위해서 특별히 비석을 세우노라.

          한국육우다경연구회

          중국국제차문화연구회

          절강성국제다인지가 기금회

          1998년 10월 8일 세우다.

    중국 다인들 조차 금당 최규용을 존경해 별처럼 우러러 뵌다고 다성(茶星)이라는 칭호로 한국사람이 부른 것이 아니라 중국인 그들 스스로 부른 것이다.

    찾아뵈면 항상 읽고 계시다 새로 안 것을 가르쳐 주셨다. 얇은 지식인의 자만심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손자를 이끌어 주시듯 자상한 모습으로 대해 주셨다.   


   5) 끽다래는 평등한 부부관계이다.   

    금당 최규용을 당대 다성(當代 茶星)으로 자리 잡음을 하게 한 분이 부인 민숙인여사이다.

    해방 뒤 민속공예계가 누추할 때 ‘고려민예사’를 이끌어 나가며 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셨기에 지금 디자인계나 민속공예계를 이끄는 분 중 민숙인여사를 모르시는 분이 없을 정도이다. 금당 최규용과 인연이 되어 차를 공부한 분도 계시겠지만 많은 분은 민숙인여사에게 민속공예를 배우러 와서 차와 인연이 되어 지금 차지도자 등을 하고 있다.

    민숙인여사는 성경에 여자는 남자를 따라야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며 금당 최규용 의견을 존중했다. 그러면 한때 스님 생활을 한 금당 최규용은 항상 경어(敬語)로써 대하시며 사람들과의 찻자리에 옆에 앉아 같이 계시도록 배려했다.

    항상 같이 다니시는 모습 속에 오늘 날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가를 행동으로 보여 주신 다인이셨다.   

  

Ⅴ. 결론


    금당 최규용를 바라보면 ‘건강하기 위해서 커피보다 차를 마신다.’라는 전제가 들어맞는다. 백세 동안 잔병 하나 없이 척주도 꼿꼿하셨다. 신체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 건강도 차인이 어떻게 자리 잡아야 되는지를 앞선이 본을 보여주었다. 돌아가신지 몇 년 되지 않아 사상을 논하기는 힘들지만, 금당 최규용의 후인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마당에 지금이라도 자료 등을 모아 두지 않으면 그 맥을 영영 차지 못해 - 금당 최규용 선생이 아무 것도 없던 곳에서 초의선사 흔적을 찾듯이 우리 후배들이 금당을 잊어버릴 것 같아 부족하나마 정리를 해 본 것이다.

 금당 최규용이 남긴 <끽다래> 사상이 운동으로 이어 갈 때 물질풍요 속에 형식화 되어버리는 차를 사람 냄새가 물신 나는 인본주의 차맛으로 나아가게 하는 등대가 될 것이다.

    금당 최규용의 유지(有志)를 받들어 “한국육우다경연구회”와 “금당차문화회” 등이 “금당문도회”를 이루고 있다.






















참고 문헌


1) 구마쿠라 이사오 엮음, 김순희 옮김, 『야나기 무네요시 다도와 일본의 미』, 소화, 1996.

2) 김대철, 『우리 차문화』, 차의 세계, 2003.

3) 동아시아선학연구소 편저, 『조주선사와 끽다거』, 차의 세계, 2003

4) 박영희, 『동다정통고』

5)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버나드 리치 엮음, 이대일 옮김, 『공예가의 길 』, 미진사, 1988. 

6)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민병산옮김, 『공예문화』, 신구, 1993. 

7)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박재희 역,  『조선의 예술』, 동서문화사, 1977.

8)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심우성 옮김, 『조선을 생각한다』, 학고재, 2002.

9) 이데카와 나오키 지음, 정희균 옮김, 『인간 부흥의 공예』, 학고재

10) 최계원, 『우리차의 재조명』, 1983.

11) 최규용, 『금당다화』, 도서출판 이른아침, 2004.

12) 최규용 역, 『다소』, 1983.

13) 최규용, 『현대인과 차』, 국제신문 출판국, 1981.

14) 최규용, 『중국차문화기행』, 도서출판 배달

15) 최규용, 『한중일 육우다경연구회 경과보고서』, 도서출판 남항, 1989.

16) 최범술, 『한국의 다도』, 보련각, 1980.

17) 한국문화학교,『다도교본』, 32쪽

18) 『다원』, 1983년 6월호

19) 『부산여성』, 1988년 5월호

20) 『차와 선』, 1996년 여름 호  

21) 『태평양 설록차』, 1989년 1월호

22) 『태평양 설록차』, 1989년 8월호

23) 『한겨레21』 2003년 1월 30일자

24) 시사저널 2005년 10월 18일자 

25) 부산대학교 효원다회,『다바라기 1990년호』

26) 전국대학다회연합,『전다련 회지 창간호』

27) 『국제신문』, 1975년 12월 14일

28) 『국제신문』, 1978년 6월 2일

29) 『국제신문』, 1979년 1월 15일

30) 『국제신문』, 1979년 1월 20일

31) 『국제신문』, 2001년 4월 24일

32) 『국제신문』, 2001년 6월 1일

33) 『국제신문』, 2002년 4월 9일

34) 『동아일보』, 1998년 11월 24일

35) 『동아일보』, 1991년 3월 27일

36) 『부산일보』, 1989년 9월 27일

37) 『부산일보』, 1997년 10월 30일

38) 『부산일보』, 2002년 2월 15일

39) 『부산일보』, 2002년 4월 8일

40) 『중국 운남일보』, 1994년 8월 24일

41) 『한겨레신문』, 2005년 9월                             

 































《Abstracts》

 A study on Guum-dang's thought of tea

-focused on his Ggic-da-re and humanism

                                                                  Kim hyun-ho


   This thesis studies on Guum-dang Choi-Gue-Yuong thought of tea on the basis of his Ggic-da-re(come to my home for taking tea), especially in the philosophy view derived from the humanism.

   Guum-dang knew culture of tea for the first time when he went to Japan, at eighteen.

   In 1934, He made a study of chinese's tea during his stayed in China.

   Since 1946, he had been concerned about Korea tea ; be called Nok-cha.

   Guum-dang related the thought of tea and the thought of religion, philosophy and belief.

   His main idea was sil-sa-gu-si(實事求是) ; he thought substance better than form .

   He expressed much of Gum-duk(儉德) that emphasize the simplicity and the virtue.

   In 1988, Guum-dang had a conference with monk Il-Ta and monk Suc-Jung for tea and popularization.

   Ggic-da-re had started since the conference in Hea-in-sa (Hea-in temple).

   He made an effort to culture of tea in Korea, was based on popularization an gave value substance, truly for him, tea was not only every day life, but also a way to cultivate a mind, make an acquaintance with people (especially, he loved youths)

   Guum-dang closed his day at Aprial, 5, 2002.

   Because of his continual instruction about tea, he was called Da-Sung(茶星 a master of tea) among many tea lovers in China.

 

Key Words : Guum-dang, Ggic-da-re, The stars of tea, Da-Sung




1) 부산일보, 2002년 2월 15일.


2) 국제신문, 2002년 4월 9일.


3) 최규용, 『금당다화』이른아침, 2004, 17쪽.


4) 최규용, 『금당다화』이른아침, 2004, 196쪽.


5) 국제신문, 2001년 6월 1일


6) 최규용, 『금당다화』이른아침, 2004, 199쪽.


7) 최규용, 『금당다화』이른아침, 2004, 18쪽.


8) 최규용 구술, 김현호 기록,『음다 일대기』1997년,


9) 최규용, 『금당다화』이른아침, 2004, 19쪽.


10) 최규용, 『현대인과 차』국제신문 출판국, 1981, 6쪽.


11) 최규용, 『현대인과 차』국제신문 출판국, 1981, 35쪽.


12) 육우다경연구회편, 『한 중 일 육우다경연구회 경과보고서』남항출판사, 1989, 11쪽.


13) 최규용, 『중국차문화기행-중국차의 원류를 찾아서』도서출판 배달, 1993, 10쪽.


14) 최규용, 『중국차문화기행-중국차의 원류를 찾아서』도서출판 배달, 1993, 11쪽.


15) 최규용, 『중국차문화기행-중국차의 원류를 찾아서』도서출판 배달, 1993, 85쪽.


16) 박노자, 한겨레21 2003년 1월 30일자, 82-83


17) 박노자, 한겨레21 2003년 1월 30일자, 82-83


18)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버나드 리치 엮음, 이대일 옮김『공예가의 길』. 미진사. 92쪽 


19)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민병산 옮김『공예문화』. 신구. 87쪽


20)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심우성 옮김『조선을 생각한다』. 학고재. 153쪽


21) 벵자맹 주와노(문화 평론가), 『조선민화, 그 무한한 상상력』시사저널 2005년 10월 18일자 82-83쪽  


22) 이데카와 나오키 지음, 정희균 옮김, 인간부흥의 공예, 학고재, 2002, 4-5쪽.


23) 최계원지음,『우리차의 재조명』, 삼양출판사 15쪽


24) 김운학지음,『한국의 차문화』, 이른아침, 2004, 43쪽


25) 한국문화학교,『다도교본』, 32쪽


26) 부산대학교 효원다회,『다바라기 1990년호』50-51쪽


27) 부산대학교 효원다회,『다바라기 1992년호』22-23쪽


28) 최규용 지음, 『금당다화』이른아침, 2004, 17쪽.


29) 국제신문. 1978년 6월 2일자


30) 한국일보. 1978년 6월 23일자


31) 최규용 지음,『현대인과 차』국제신문 출판국, 1981.


32) 최규용 지음,『현대인과 차』국제신문 출판국, 1981. 28쪽


33) 최규용 지음,『현대인과 차』국제신문 출판국, 1981. 35쪽


34) 국제신문. 1979년 1월


35) 최규용 번역,『다소』,1983.


36) 최규용 지음,『중국차문화기행』, 배달, 1993.


37) 최규용 지음,『중국차문화기행』, 배달, 1993. 2쪽


38) 다원, 1983년 6월호, 154-155쪽


39) 차와 선, 1996년 여름호, 9-10쪽


40) 차와 선, 1996년 여름호, 9-10쪽


41)  『태평양 설록차』, 1989년 1월호, 14쪽


42) 『태평양 설록차』, 1989년 1월호, 14쪽


43) 『태평양 설록차』, 1989년 1월호, 15쪽


44) 이기윤 지음, 『한국의 차문화』, 개미, 2000. 195쪽


45) 김대철지음, 『우리 차문화』, 차의 세계, 2003년 347-354쪽


46) 최범술은 경남 사천 출신이며, 다솔사 주지로 활동하였습니다. 삼일운동 당시 활동으로 90년에 애족장을 서훈받았습니다. 그러나 1938년 북지황군위문사로 한 달동안 일본군을 위문하였습니다. 1939년에는 다솔사에서 내선불교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친일행적이 발견되었기에 재심을 신청한 것입니다. 자료는 불교 신 10집(1938. 2. 1)과 신11집(1938. 3. 1), 선우도량, {22인의 증언을 통해본 근현대불교사}, 2002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47) 『태평양 설록차』, 1989년 1월호, 15쪽


48) 김운학지음,『한국의 차문화』, 이른아침, 2004, 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