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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린위탕 [林語堂(림어당), 1895.10.10~1976.3.26]

매공tea 2008. 11. 12. 13:41
  • 린위탕 [林語堂(림어당), 1895.10.10~1976.3.26]
  • 린위탕 [林語堂(림어당), 1895.10.10~1976.3.26] ●임어당(林語堂, 1895-1974, 초명은 위탕[玉堂] ) 중국의 소설가 ·문명비평가.출생지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 상해 성요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과 독일에 유학 1936년 도미, 1948년 유네스코 예술문학 예술문학부장 역임 프린스톤 대학 교수 역임 1953년 자유중국 유엔대표 고문 역임 저서 : [생활의 발견], [북경호일], [폭풍우 속의 나뭇잎] 등 원이름은 위탕[玉堂].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上海]의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厦門]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武漢政府]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19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1934년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1935년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我國土我國民)》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Moment in Peking(北京好日)》(1937) 《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orm》(19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俗物性)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 ·이성(理性) ·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19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1970년 6월, 제37차 국제 펜클럽 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었다. *** 생활의 발견행복이란 무엇인가-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자신의 즐거움, 가정생활의 즐거움, 나무 꽃, 구름, 시내, 폭포 그 밖의 삼라만상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또 어떤 형태의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유쾌란 대화, 독서의 즐거움 등이 그것이다. 맛있는 음식, 유쾌한 모임, 가족의 단란, 아름다운 봄날 소풍 등의 즐거움처럼 분명한 것도 있고, 시가, 미술, 자색의 즐거움처럼 그다지 분명치 않은 것도 있다. 이들 두 부류의 즐거움을 물질적인 것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부르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이 구별을 믿지 않으며, 그리고 이렇게 분류하려고 생각할 적마다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남녀노소의 유쾌한 소풍 모습 등을 보고, 그들의 줄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한 아이는 풀숲 위에서 깡총거리고, 다른 아이는 들국화를 따서 화환을 만들며 놀고 있고, 어머니는 한 조각의 샌드위치를 들고 있고, 삼촌은 잘 익은 사과를 먹고 있으며, 아버지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풀 위에 누워 있고, 할아버지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다. 누군가가 축음기를 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멀리서는 음악이나 물소리가 아득히 들려 오기도 한다. 이러한 즐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것이겠는가?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과, 우리가 시정(詩情)이라고 부르는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 일컬어지는 파이프 취미보다 고급스런 즐거움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물질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며,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기도 하거니와 별로 신통치 못한 사고방식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엄밀히 구별하고, 참된 즐거움을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음미하지 않는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내 주장이 너무 독단적인 것일까? 또는 인생의 본래 목적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함에 있어 논점의 중심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일까?나는 지금까지 생활의 목표는 그 참된 즐거움에 있다고 말해왔다.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을 쓰기를 주저한다. 참된 즐거움을 취지로 하는 인생의 목표나 목적 등은, 인생에 대한 인간 본래의 태도가 어떠한가라는 그런 의식적 목적이 아니다. '목적'이라는 말은 공부나 노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당면하는 문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 60년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 발견되도록 인생을 규정해 나가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과 같으며, 광대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적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는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이에 반해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비하는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인생에는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고 독단하고 나서기 때문에 논리가 일목요연하지 않다. 서구의 사상가들이 너무나 맹렬히 파고든 이 문제가 오늘날에 중요성을 갖게 된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신학의 영향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설계니 목적이니 하는 것을 지나치게 가정한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도 하고 논쟁도 벌이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문제가 매우 헛되며 불필요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생에 목적이나 설계가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토록 난해하고 막연하며, 귀찮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문제는 결국 두 가지이다. 즉, 신이 인간을 위해서 정한 신성한 목적 아니면, 인간이 자기에 대하여 정한 인간적인 목적 중 하나이다. 전자에 관한 한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의 배려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으로써 신의 지능을 추측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흔히 이 같은 이론의 최종 결과는, 신을 우리 군대의 기수로 삼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맹목적 애국자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후자에 있어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은 아니다. 즉, 실제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에 대해서라면 누구든 자기의 사고방식이나 가치판단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항상 논쟁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가치판단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너무 철학적이 아니고 좀더 실제적이면 족하다. 나는 인생에는 반드시 목적이나 의의가 있어야만 한다는 따위의 억측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월트 휘트먼도 말한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아마도 아직 수십 년이나 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해지고, 두 가지의 다른 해답이 나오지 않고 오직 한 가지만이 있을 따름이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외엔 인생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모든 이교도 철학자에게는 커다란 문제인 이 행복론을 기묘하게도 기독교 사상가들은 등한시하고 있다.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문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혹한 말이지만 인류의 '구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침몰중인 배 안의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꼼짝없이 최후의 운명이라거나,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가를 생각하는 심정이다. '망해가는 그리스와 로마의 마지막 탄식'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기독교에는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구제라는 문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아 이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는 문제 속에서는 망각되어 있다.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은 생각하면서도 구제라는 것에 대해 왜 그토록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인가.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제라는 것에 너무도 열중하여 인생의 행복...더보기
출처 : Daum 신지식
글쓴이 : withoutQ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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